보이는 것은 내가 아니다. 몸도, 생각도, 감정도 보이는 것이므로 내가 아니다. 보는 놈을 떠나, 보이는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보는 놈이 나다. 그러나 보는 놈을 볼 수가 없다. 확연할 뿐이다. 즉 보이는 것을 떠나, 보는 놈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은, 동전의 앞면 뒷면과 같이 둘이 아니다. 이름을 따르면,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은 둘이다. 이름을 따르지 않으면, 보는 놈이라 해도 둘이 아닌 한 자리이고, 보이는 것이라 해도 둘이 아닌 한 자리이다(35쪽).
부처는 금강경에서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그 이름이 부처다.”라고 하였다. 이름에 해당하는 어떤 사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름일 뿐이다. 이름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이름에 해당하는 물건이 따로 있다고 고집하며, 이름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 이름이 실재를 대신한다. 이름은 고정된 것이다. 이름은 마치 사진과 같아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 때문에 우리의 일상이 헌 것이 되고, 따분해지고, 지루해진다. 부처는 금강경에서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은 허망하다.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따로 없음을 보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본다.”고 하였다. 이름만 따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일기일회여서 순간순간 새로울 뿐이다(103쪽).
모든 일이 지금 여기 일이다. 밝음이 오면 밝음을 비추고 어둠이 오면 어둠을 비추나, 밝음과 어둠에 물들지 않는다. 아무리 밝아도 이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아무리 어두워도 이것을 감추지 못한다. 기쁨이 오면 기쁨을 비추고 슬픔이 오면 슬픔을 비추나, 기쁨과 슬픔에 물들지 않는다. 기쁨과 슬픔을 두고 취사하지 않으니, 언제나 한결같이 여여하다. 생사를 그대로 비추어 내나, 생사에 물들지 않는다. 생도 고집하지 아니하고 사도 고집하지 않아, 그저 인연에 따를 뿐이다. 육도윤회를 돌고 돌아 언제나 비추어 낼 뿐, 천국에도 지옥에도 물들지 않는다(106쪽).
우리 공부는 생각을 비우는 공부가 아니다. 우리 공부는 생각으로부터 탈출하는 공부가 아니다. 우리 공부는 밖에서 안으로 찾아가는 공부가 아니다. 우리 공부는 분별에서 분별없는 곳으로 가는 공부가 아니다. 우리 공부는 분별이 들끓는 속세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가는 공부가 아니다. 우리 공부는 생각의 위험을 깨닫자는 공부가 아니다. 우리는 생각을 하며 산다. 이는 분명 우리의 현존 모습이다. 생각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이다. 있는 그대로를 깨닫고자 하면서, 어찌 생각하는 우리를 제외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이는 실재를 외면한, 처음부터 잘못된 공부다. 우리 공부는 “생각이 생각이 아니라, 그 이름이 생각이다.”를 깨닫는 공부이다. 하루 종일 생각하면서 살되, 한 생각도 한 바 없음을 확인하는 공부이다. 그래서 본래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임을 확인하는 공부이다(157쪽).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니니, 바다는 파도를 두고 취사하지 않는다. 하늘과 구름이 둘이 아니니, 하늘은 구름을 두고 취사하지 않는다. 열반과 윤회가 둘이 아니니, 여래는 윤회를 두고 취사하지 않는다. 본래 둘이 아니니, 이름일 뿐인 무상(無相)한 경계를 두고 어찌 취사하며 힘들어 할 것인가? 세간과 출세간이 모두 잠꼬대이고 꿈인 줄만 알면, 세간이 출세간이고 출세간이 세간이다. 열반과 윤회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출세간에 손댈 곳이 없듯이, 세간 또한 완벽하여 손댈 곳이 없다. 누가 보살을 두고 세간의 모습을 바꾸려는 사람이라고 하였는가? 그는 다만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만으로 모든 중생을 구하였다. 세상 경계를 바꾸려 함은 어리석은 사람의 몫이다(236쪽).
일상이 삼매(三昧)다. 우리의 일상이 그대로 열반이니, 열반이 따로 있다고 하여 구하고자 한다면, 토끼 뿔을 구하는 것과 같이 잘못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하여 일하고 고단한 몸으로 퇴근하여 쉬는 것이 모두 열반이다. 순간순간 취하고 버림의 연속인 듯하나, 취함이 취함이 아니요 버림이 버림이 아니다. 이는 본래 주객이 둘이 아니요, 물물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그러하니, 우리의 분별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 둘로 보는 분별 망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분별 망상만 쉬면 될 뿐, 달리 삼매를 구할 일은 아닌 것이다(262쪽).
Contents
서문(序文)
일러두기
소를 찾아 나서다(尋牛)
1. 석가, 조사선의 가르침
2. 불교는 윤회(輪廻)를 밝히고자 함이 아니다
3.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것은?
4. 세계가 무한이라 하나
5. 당신은 누구인가?
6. 나를 찾아 떠나 보자
7. 부정(否定)의 방편(方便)
8. 감추어진 것 없이 모두 드러나 있다
소 자취를 발견하다(見跡)
9. 만물이 지금 여기 일이다
10. 깨달음(覺)뿐이다
11. 어인 일인가요?
12. 모든 일이 주객불이(主客不二)의 지금 여기 일일 뿐이다
13. 다이아몬드
14. 나를 바로 아는 것이 있는 그대로에 눈을 뜨는 것이다
15. 연기(緣起)에 대한 소고(小考)
16. 귀의(歸依)
소를 찾다(見牛)
17. 눈은 눈이 아니다
18. 무아(無我)
19. 삼계(三界)를 벗어난 열반(涅槃)
20. 세계일화(世界一花)
21. 둘이 아닌 자는 누구인가?
22. 견성(見性)
23. 이해(理解)와 증득(證得)
24.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
25. 어찌 감출 수가 있을까?
소를 얻다(得牛)
26. 지금 여기 내 일뿐이다
27. 기적(奇蹟)
28. 둘이 아니다
29.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30. 있는 그대로는?
31. 아공(我空) 즉 법공(法空)
32. 일기일회(一期一會)
33. 본래 청정하여 오염된 바 없다
34. 모든 것이 허망하다(皆是虛妄)
35. 너는 누구냐?
36. 만법무자성(萬法無自性)
소를 길들이다(牧牛)
37. 한 생명(生命)
38. 무상(無常)
39.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福)이 있나니
40. 나..는.. 누..구..인..가..?
41. 촉목보리(觸目菩提)
42. 무위(無爲)의 공덕(功德)
43. 세상(世上)이 나다
44. 사물과 이름
45. 내 소가 백장 밭에 들어간다
46. 대화(對話)
47. 우리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48. 허무안(虛無眼)
소를 타고 집에 돌아오다(騎牛歸家)
49. 시공간은 분별이 그려 놓은 그림이다
50.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51. 명명백백(明明白白)
52. 불이(不二) 중도(中道)
53. 불이(不二) 즉 이(二)
54. 설법(說法)이란 것은?
55. 연기(緣起)는 중도(中道)다
56. 죄(罪)는 자성(自性)이 없다
깨달음을 내려놓다(忘牛存人)
57. 세상은 연극 무대이다
58. 거울과 영상은 둘이 아니다
59. 오직 나(覺)뿐이다
60. 침 뱉을 곳이 없다
61. 자유(自由)
62. 단지불회(但知不會)
63. 영가(靈駕)여!
64. 시공간은 무상(無常)하여 그림자일 뿐이다
망상도 보리도 내려놓다(人牛俱妄)
65. 환영(幻影, illusion)
66. 꿈이다
67. 사사(事事)는 여여(如如)하다
68. 나날이 새롭고 또 새롭다(日日新又日新)
69. 대상은 이름일 뿐이다
70. 나를 바로 아는 것이 있는 그대로에 눈을 뜨는 것이다
71. 보살은 취사(取捨)함이 없다
본래 자리로 돌아오다(反本還源)
72. 지..금.. 여..기.. 일..뿐..!
73. 모든 일을 성취하는 지금 여기
74. 나는 그림자였다!
75. 있는 그대로의 세상
76. 당신은 누구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77. 먼저 떠난 벗에게
78. 내 본래 얼굴 지금 여기 일이니
79. 나는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이다
80. 우리가 서 있는 자리
81.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82. 부정(否定)도 긍정(肯定)도 말라
83. 있는 그대로의 세계
84. 지족(知足)
85. 일 없는 사람
출세간의 안목으로 세간을 산다(入廛垂手)
86. 을지문덕 장군이 진군할 때 울린 북소리를 가져오너라
87. 가되 간 바가 없다
88.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89. 소유냐 삶이냐?
90. 지인(至人) 삼무(三無)
91. 탐진치(貪嗔痴) 그대로가 해탈이다
92. 나 이외 다른 신(神)을 섬기지 말라
93. 은산철벽(銀山鐵壁)은 나(ego)였다
94. 사랑
95. 공부의 뜻은 세간(世間)에 있다
96. 세상은 생각의 산물이다
97. 시공간의 세계와 지금 여기
98.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
99. 내가 없다
100. 심우도(尋牛圖)
Author
선재 박준수
196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판사로 근무한 후 2000년부터 변호사 업무를 하였다. 대학교 재학 시절 탄허 스님에게 화엄학을 공부하였고 중년에는 백봉 김기추 거사님으로부터 받은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참구하였다. 이후 청광 선사님께 화두 점검을 받았고 60살이 넘어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님에게 법문을 들으며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실마리를 잡았다. 이후 저자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삼일선원, 선불장에서 조사선 법문을 하고 있다.
1965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판사로 근무한 후 2000년부터 변호사 업무를 하였다. 대학교 재학 시절 탄허 스님에게 화엄학을 공부하였고 중년에는 백봉 김기추 거사님으로부터 받은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참구하였다. 이후 청광 선사님께 화두 점검을 받았고 60살이 넘어 무심선원 김태완 선생님에게 법문을 들으며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실마리를 잡았다. 이후 저자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삼일선원, 선불장에서 조사선 법문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