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나 마하리쉬와 아기장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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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02/14
Pages/Weight/Size 148*210*20mm
ISBN 9791137273887
Categories 에세이
Contents
들어가기에 앞서
갓난아기에게 장난감을 보여주면 경험된 정보가 없어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 한다. 눈에 무언가 비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목숨이 끊어져야 가능하지만 눈에 사물이 비치고 귀에 소리가 들려오는 그것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보이고 들리는 것을 알지 못해 음식을 섭취할 줄도 모르고 허기짐도 모른 채 모든 것이 멈추어 육신의 생존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그처럼 순수한 앎이 부처이고 본성이며 진아지만 그것을 보고 들은 기억으로 덧씌워 마음으로만 사용하면서 인간은 무명의 늪으로 빠졌다. 마음도 앎이 있어야 마음일 수 있고 육신도 앎이 있어야 부패되지 않건만 아무것도 달라붙지 못하는 순수한 앎, 그 자체가 진아이며 부처임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이번 생애에 해야 할 모든 일을 마쳤으며 깨달음을 얻고 삶과 죽음의 고통이 가득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산 채로 무한한 지복감으로 충만한 열반에 이르리라.

이를 아기장난감으로 표현하고자 하며 만일 참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나 진아가 아닌 사람이 없으며, 진아가 되기 위한 깨달음을 찾아 밖에서 구해 얻으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지니고 있는 진리를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저서인 ‘나는 누구인가’에 등장하는 방문자들과의 대담에서 마하리쉬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아의 길에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의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즉 확고한 믿음을 통해 이해하고 실천하면서 증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장남감이라는 돋보기로 비추면서 어긋남이 없는지를 살필 수 있다면 죽어있는 언어나 책에서 펄펄 살아있는 생명의 지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무각합장
* 라마나 마하리쉬의 진아의 여정

모든 개아들(jivas)은 어떤 불행도 없이 늘 행복하기를 바라고, 각자에게는 그들 자신에 대한 지고의 사랑이 존재하며, 행복이야말로 그 사랑의 이유이므로, 바로 우리의 성품인 그리고 마음이 없는 깊은 잠 속에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그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야말로 주된 수단이다.

나는 누구인가, 일곱 가지 구성 요소(단백질·피·살·지방·골수·뼈·정액)로 된 거친 몸은 ‘나’가 아니다. 소리·감촉·형상·맛과 냄새의 다섯 가지 감각 지식을 아는 귀·피부·혀와 코의 다섯 가지 지식기관은 ‘나’가 아니다. 말하고·걷고·주고·배설하고·즐기는 입·다리·손·항문·생식기의 다섯 가지 행위 기관은 ‘나’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생명 기능을 수행하는 쁘라나(prana)를 위시한 다섯 가지 생명 기운은 ‘나’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나’가 아니다. 모든 감각 지식과 모든 행위가 없을 때 감각 지식을 향한 대상습만 남아 있는 깊은 잠의 무지도 ‘나’가 아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은 ‘나’가 아니다. ‘나가 아니다’라고 부정해 버렸을 때, 홀로 남아 있는 앎 자체가 ‘나’이다. 이 앎의 성품은 존재·의식·지복이다.

모든 앎과 모든 행위의 원인인 마음이 가라앉으면 세계에 대한 지각도 그칠 것이다. 상상으로 덧씌움인 뱀에 대한 앎이 사라지지 않으면 바탕인 밧줄에 대한 앎이 얻어지지 않듯이, 덧씌움인 세계에 대한 지각이 그치지 않으면 바탕인 진아에 대한 깨달음도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진아 성품 안에 존재하는 놀라운 힘이다. 그것이 모든 생각을 투사한다. 생각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 보면 따로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으며, 따라서 생각이야말로 마음의 형상이다. 생각들 외에는 세계라고 할 다른 것이 없다. 잠 속에서는 생각이 없고, 따라서 세계도 없다. 생시와 꿈속에서는 생각이 있고, 따라서 세계도 있다.

거미가 그 자신 안에서 실을 자아내었다가 다시 그 자신 속으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그 자신 안에서 밖으로 세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그 자신 속으로 흡수한다. 마음이 진아 성품에서 밖으로 나오면 세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세계가 나타날 때는 성품이 나타나지 않고, 성품이 나타날 때는 세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성품을 탐구해 들어가면 '자기'야말로 마음인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자기'라고 하는 것은 진아 성품이다. 마음은 늘 하나의 거친 사물을 좇아서, 즉 몸을 ‘나’와 동일시함으로써 존립하며, 독자저으로는 존립하지 않는다. 마음이야말로 미세신(身)이라고 하는 것이고, 개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몸 안에서 ‘나’로서 일어나는 그것이야말로 마음이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 몸 안에서 처음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지를 탐색해 보면 심장 안에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곳이야말로 마음의 근원이다. '나, 나'하고 계속 생각하기만 해도 그것이 우리를 진아로 이끌어 줄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나’라는 생각이 최초의 생각이다. 이것이 일어난 뒤에야 다른 모든 생각이 일어난다.
일인칭, 혹은 '나는 아무개다'라는 느낌의 주체인 ‘나’가 나타난 뒤에야 2인칭과 3인칭이 나타나며, 일인칭 없이는 2인칭과 3인칭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에 의해서만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며, ‘나는 누구인가’하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을 소멸한 뒤에 그 자체도 화장터의 부지깽이 막대기처럼 소멸될 것이다.

만일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것을 완성하려 하지 말고 그것들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탐구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무슨 대수인가,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한 생각이 나타나는 즉시 '이것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를 탐구하면 '나에게'라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누구인가’하고 탐구하면 마음은 그 근원인 진아로 돌아갈 것이며, 일어난 생각들도 가라앉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거듭하여 수행하면 마음이 그 근원에 안주하는 힘이 증가할 것이다. 미세한 마음(주의력)이 두뇌와 감각 기관의 문을 통해 나가면 거친 이름과 형상들인 대상들이 나타나고, 그것이 마음의 근원인 진아에 안주할 때는 이름과 형상들이 사라진다. 마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진아에 붙들어 두는 것을 '나를 향하기' 혹은 '안으로 향하기'라고 부른다. 그것이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을 '밖으로 향하기'라고 부른다. 이와 같이 마음이 진아에 안주할 때 모든 생각의 뿌리인 ‘나’라는 생각인 에고가 사라지고, 항상 존재하는 진아만이 빛나게 될 것이다.

‘나’라는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는 상태야말로 본성이다. 그것이야말로 '침묵'으로 불린다. 이와 같이 고요히 있음을 ‘지견’이라고 부른다. 고요히 있음이란 자기주시를 통해 마음을 진아 성품 안에 가라앉게 하는 것이다. 그 외에 남들의 생각을 안다든가, 과거·현재·미래를 안다든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 등은 결코 지견일 수가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아의 성품뿐이다.


☞ 마음은 컴퓨터 하드에 저장된 각종 정보와 같다. 그러한 정보들에 의해 컴퓨터가 움직이지만 저장된 정보가 컴퓨터의 마음은 아니다. 정보는 언제든 지우고 다시 입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장된 정보들은 마음의 그림자일지언정 실체는 아니다. 컴퓨터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은 같은 원리로 동작되고 있다. 컴퓨터의 마음이라 불리는 실체는 하드의 빈 공간이다.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는 빈 공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언제든 바꿔 낄 수 있는 것은 정보에 해당하므로 정보를 저장시키는 창고가 마음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저장 창고는 변해감이 없는 속성을 지녀야 한다. 만일 바뀌고 달라진다면 정보를 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바탕은 변함없는 허공처럼 존재할 것이다. 온갖 정보와 기억의 구름이 허공을 메우고 있어도 허공은 언제나 변함없이 한결같다.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구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름은 영역이 있으므로 가리킬 수 있지만 허공은 알맹이가 따로 없기에 가리킬 만한 곳이 없다. 따라서 짐작하고 가리킬 수 있다면 마음의 그림자이기에 가능하다는 의미도 된다. 가리킬 수 없는 그것이 곧 마음의 실체이며 진아이다. 컴퓨터의 마음은 기억된 정보가 아니라 빈 공간인 것처럼 우리가 이 마음을 버리고 본성의 마음을 구하려는 것은 빈 공간을 찾으려는 것과 같다.

빈 공간이라면 거기에서 무엇을 볼 것이며 무슨 알맹이를 찾고자 뒤적거릴 것인가, 온갖 정보로 이루어진 마음의 그림자를 마음이라 아는 탓에 기쁨에 들뜨기도 하며 슬픔에 좌절하기도 하면서 어떤 경계를 만나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본성을 찾게 되면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리라 생각한다. 본성의 마음 역시도 내가 볼 수 있고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며 마음을 정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끝없이 늘어선 행렬처럼 이어질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기도 한 때문이다.

그런데도 번번이 마음 찾기에 실패하는 것은 내면의 도시락에 밥 알갱이가 하나라도 붙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빈 도시락이 아니다. 스크린에 점 하나라도 영상을 비추게 되면 스크린은 여지없이 가려지듯이 부지런히 달려서 빈 공간에 이르렀다 해도 빈 공간을 보려는 생각이 밥알 한 알갱이로 달라붙은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빈 공간은 본성을 보려는 밥알 한 알갱이 때문에 가려져 있다. 또한 이것만이 참된 실체이며 다른 것은 모두 허망하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은 밥알 한 알갱이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것만이 진실하다는 생각까지 비우고 덜어내지 못하면 본성의 마음을 향한 길에는 비록 한 알갱이의 밥알일지라도 비워진 도시락과 텅 빈 스크린을 거부하기에 끝끝내 붙어 있는 밥알 한 알갱이로 남을 것이다.

* * *
마치 무엇을 붙들려고 늘 움직이는 코끼리의 코에 쇠사슬을 쥐어주면 코끼리는 그것만 쥐고 있지 다른 것을 붙들지 않듯이, 늘 움직이는 마음도 하나의 이름이나 신의 형상으로 훈련시키면 그것만을 붙들고 있게 된다. 마음이 무수한 생각들로 확산되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생각은 아주 약해진다.

생각이 점점 줄어들면서 일념 집중을 얻게 되고, 그렇게 하여 힘을 얻은 마음에게는 자기 탐구가 쉽게 성취될 것이다. 진아안주 안에 확고히 머물러 진아의 자기 주시가 아닌 어떤 생각도 일어날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이, 신에게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

신에게 아무리 많은 짐을 지워드린다 해도, 그는 모든 짐을 져 줄 것이다. 지고한 신성의 힘이 모든 행위를 주관하고 있는데, 왜 그 힘에 우리 자신을 맡겨 버리지 않고 늘 '나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기차가 모든 짐을 날라 준다는 것을 알면서, 왜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우리가 우리의 작은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행복하게 있지 않고, 그것을 머리 위에 이고 있어야 하는가, 행복이라는 것은 진아의 성품일 뿐이며, 행복과 진아의 성품은 다르지 않다. 진아 행복만이 존재하고, 그것만이 실재한다.

세간의 대상 중 어느 것 안에도 행복은 전혀 없다. 그런 것들에서 우리가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분별 부족 때문이다. 마음이 밖으로 나올 때는 불행을 경험한다. 사실 우리의 생각(욕망)이 충족될 때마다 마음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 진아의 행복을 체험하는 것일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깊은 잠, 삼매, 바라던 것을 얻었을 때, 싫어하던 것이 소멸될 때는 마음이 안으로 향해져서 진아의 행복을 경험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은 진아를 떠나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쉼 없이 요동한다.

나무 밑의 그늘은 시원하다. 바깥의 햇볕은 뜨겁다. 밖에서 헤매던 사람이 그늘 안으로 들어가면 시원해진다. 다시 밖으로 나가면 더위를 참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다시 나무 밑으로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그는 그늘을 떠나 햇빛 속으로 나갔다가 햇빛을 떠나 그늘로 들어오기를 반복한다. 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은 분별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분별이 있는 사람은 그늘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인의 마음은 진아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의 마음은 세계 속을 배회하며 계속 불행을 겪다가, 잠시 진아로 돌아와서 행복을 즐긴다. 세계라는 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가 사라질 때, 즉 생각이 없을 때, 마음은 지복을 경험한다. 세계가 나타날 때 마음은 불행을 경험한다.

모든 경전에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그 마음 제어만이 경전들의 최종적 판정임을 알고 나면 경전들을 끝없이 공부해 봐야 이익이 없다.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어떻게 경전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구하겠는가,

자기를 아는 것은 자신의 지혜(知)의 눈에 의해서이다. 라마가 자신이 라마임을 알기 위해 거울이 필요한가, '자기'는 다섯 껍질의 안에 있는 반면 경전은 그것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다섯 껍질을 젖혀두고 탐구해야 하는 자기를 저작물들 안에서 탐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속박되어 있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구하여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아는 것만이 해탈이다. 언제나 마음(주의)을 진아 안에 고정하는 것만을 아는 것만을 자기 탐구라 하며, 명상은 자기를 존재-의식-지복인 브라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쓰레기를 쓸어 담아 내버려야 할 사람이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듯이, 자기를 알아야 할 사람이 진아를 은폐하고 있는 범주들(세계, 영혼, 신을 구성하는 원리들)을 모두 한데 모아 내버리지 않고, 그 수를 헤아리고 그것들의 성질을 자세히 조사해 봐야 아무 이익이 없다.

세간은 하나의 꿈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생시는 길고 꿈은 잠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차이가 없다. 생시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이나 꿈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도 그때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꿈속에서는 마음이 다른 몸을 취한다. 생시와 꿈 모두에서 생각 및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일어난다. 따라서 두 상태 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이라는 두 가지가 있지는 않다. 마음은 하나일 뿐이다.


☞ 우리가 고통을 회피하려는 것은 실제로 평생에 걸쳐 행해지고 있다. 고통이 있는 그 자리에 기쁨과 행복이 들어차야 하기 때문이다. 즉 마음을 슬픔의 마음과 기쁨의 마음으로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나누어놓고 슬픔의 마음은 성내어 떨치고 기쁨의 마음은 붙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석의 한 극단만을 원하여 끝없이 잘라내도 양 극단은 끝없이 생겨날 것이다.

고통을 회피하든 기쁨을 열망하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눌 수 없는 마음을 둘로 나누려는 어리석음이 문제이다. 한 얼굴로 울고 웃듯이 한마음을 갖고 슬픔도 느끼고 기쁨도 느낀다. 그래서 슬픔 뒤엔 기쁨이 감추어져 있고 기쁨 뒤엔 슬픔이 숨겨져 있다. 이 같은 이치를 알지 못하기에 내 맘에 들고 안 들고를 따라 마음이 요동치는 것이다.

상대적 관념으로 이뤄진 마음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이것과 저것을 나누려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이미 고통을 잉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빠져든 고통의 늪에서 벗어날 기약 없이 방황하는 것이다. 고통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실체라고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참마음을 바로 알지 못하기에 마음을 거짓된 마음이니 참마음이니 하면서 나누지만, 이것과 저것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스크린에는 무수한 영상들이 스쳐 가지만 제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스크린과 영상이 아니다. 만일 스크린과 별개로 존재하는 영상이 있다면 그것은 변하고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으며 심지어는 나란 존재도 없다. 윤회설이나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 해도 인간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업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어제가 있으니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니 내일도 있음을 의미한다. 나란 존재는 현생에서 육신과 마음의 유기적인 관계를 나라고 알고 있듯이 과거생에서도 그와 똑같이 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며 미래생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나란 존재 중에서 어떤 것을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재의 나를 나라고만 안다 해도 머지않아 현생은 과거생으로 흘러갈 것이다. 나라는 관념을 지닌다는 것은 마치 흐르는 물에 표시한 것처럼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 잠이 들었다가 오늘 깨어났다고 해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달리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란 존재가 어제의 옷을 입은 나를 만났고, 오늘은 새로운 오늘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해서 오늘의 나만을 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바뀐 것은 어제라는 옷과 오늘이라는 옷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옷만 갈아입어도 나는 변해갈 것이다.

그렇기에 육신과 옷이 달라졌다고 해도 늘 변해감이 없는 내가 진실한 나인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현생에서의 나만을 나로 여기는 그릇된 관념으로 인해 욕망과 분노에 물드는 일은 어찌 생각하면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흥분하며 노발대발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의식이 있는 나를 나라고만 생각할 수도 없다. 잠든 것도 나이기 때문이며 육신이 죽음을 맞아 소멸된다 해도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육신이 완전히 사라지고 마음까지 소멸되어도 무언가는 소멸되지 않으므로 업력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란 존재는 육신의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존재하는 그것이 나일 것이다. 육신이 없으므로 감각 기관도 없어 마음도 생겨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존재하므로 육신이 소멸되어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듯 새로운 육신을 받게 된다. 우리가 참나를 알지 못하며 산다는 것은 매 순간 흐름의 옷을 입고 변해가는 세상에서 사방팔방으로 집착의 벽을 쌓아놓고 흐름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것도 어쩌면 끝없는 흐름의 길로 들어선 존재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세상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진리가 한 가지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번뇌에 속박된 마음도, 자유를 갈망하는 그 마음도 모두가 거짓된 허망한 마음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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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