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출신의 시인이며 작곡가이자 가수다. 노래를 직접 쓰고 부르는 러시아 음유시가의 개척자로서 평생 200여 곡을 작곡하고 노래했다. 오쿠자바는 당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트빌리시로, 다시 모스크바로, 그다음에는 우랄 지역으로 옮겨 다니는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어머니가 체포된 후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겨우 모스크바로 오게 되었으나, 1939년에 다시 트빌리시로 이사를 갔다. 이렇게 오쿠자바는 민족의 적인 스파이의 아들이라는 억울한 오명을 쓰고, 가혹한 환경에서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시인 오쿠자바의 성격과 문학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17세이던 1941년 군대에 들어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몇 차례 부상당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그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제대한 후 오쿠자바는 트빌리시 주립대학교에 입학해 1950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모스크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칼루가 인근의 시골 학교 교사로 4년간 근무하면서 문학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 후 1955년 양친이 복권되자, 더 좋은 여건에서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1956년 모스크바로 이주해 ‘젊은 근위대(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에 정착해도 좋다는 허가도 받았다. 1961년에는 작가동맹의 회원이 되었고, 이후 독립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때 기타를 치는 음유시인으로 인기를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1950년대부터 노래를 불러 왔지만, 1960년에야 비로소 그의 첫 번째 노래시 연주회를 열었다. 서정적 멜로디와 지적인 음성이 잘 조화를 이룬 그의 노래는 1970년대 말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못했으나,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녹음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흐루쇼프 시대의 정치적 해빙기를 맞아 떠오르는 시인으로 각광을 받던 오쿠자바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으나, 그의 작품들은 1980년도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첫 번째 시집 《서정시》를 필두로 시집 《섬들》과 소설 《자유의 맛》 등이 있고, 1991년에는 ‘소비에트연방 국가 상’을 수상했다.
오쿠자바는 1997년 6월 12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클라마르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는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인 마르부르크의 문인협회의 초청으로 협회가 주관한 저녁 연회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그다음 예정된 공연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러나 파리 공연이 있기 전날 밤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마르부르크에서의 자작시 낭송과 청중들과의 대화가 오쿠자바 생애의 마지막 공연이 된 셈이다. 파리에서 사망한 후 오쿠자바는 모스크바의 바간코프 묘지에 묻혔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는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99년 가을에 개최된 제1회 국제 오쿠자바 학회에는 약 30여 명의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 시인 오쿠자바를 20세기의 푸시킨이라 평가했다. 그의 노래시는 현재 미국, 프랑스, 스웨덴,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안되어 불리고 있다.
모스크바 출신의 시인이며 작곡가이자 가수다. 노래를 직접 쓰고 부르는 러시아 음유시가의 개척자로서 평생 200여 곡을 작곡하고 노래했다. 오쿠자바는 당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트빌리시로, 다시 모스크바로, 그다음에는 우랄 지역으로 옮겨 다니는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어머니가 체포된 후에는 외할머니와 함께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겨우 모스크바로 오게 되었으나, 1939년에 다시 트빌리시로 이사를 갔다. 이렇게 오쿠자바는 민족의 적인 스파이의 아들이라는 억울한 오명을 쓰고, 가혹한 환경에서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시인 오쿠자바의 성격과 문학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17세이던 1941년 군대에 들어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몇 차례 부상당한 경험이 있는데, 이것이 그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제대한 후 오쿠자바는 트빌리시 주립대학교에 입학해 1950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모스크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칼루가 인근의 시골 학교 교사로 4년간 근무하면서 문학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 후 1955년 양친이 복권되자, 더 좋은 여건에서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1956년 모스크바로 이주해 ‘젊은 근위대(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에 정착해도 좋다는 허가도 받았다. 1961년에는 작가동맹의 회원이 되었고, 이후 독립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때 기타를 치는 음유시인으로 인기를 얻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1950년대부터 노래를 불러 왔지만, 1960년에야 비로소 그의 첫 번째 노래시 연주회를 열었다. 서정적 멜로디와 지적인 음성이 잘 조화를 이룬 그의 노래는 1970년대 말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못했으나, 그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공식적으로 녹음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흐루쇼프 시대의 정치적 해빙기를 맞아 떠오르는 시인으로 각광을 받던 오쿠자바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남겼으나, 그의 작품들은 1980년도에 들어서야 공식적으로 출판되었다. 첫 번째 시집 《서정시》를 필두로 시집 《섬들》과 소설 《자유의 맛》 등이 있고, 1991년에는 ‘소비에트연방 국가 상’을 수상했다.
오쿠자바는 1997년 6월 12일 프랑스 파리 근교의 클라마르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그는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인 마르부르크의 문인협회의 초청으로 협회가 주관한 저녁 연회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그다음 예정된 공연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러나 파리 공연이 있기 전날 밤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끝내 숨을 거두었다. 마르부르크에서의 자작시 낭송과 청중들과의 대화가 오쿠자바 생애의 마지막 공연이 된 셈이다. 파리에서 사망한 후 오쿠자바는 모스크바의 바간코프 묘지에 묻혔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는 그를 추모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99년 가을에 개최된 제1회 국제 오쿠자바 학회에는 약 30여 명의 국내외 연구자들이 참가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노래한 시인 오쿠자바를 20세기의 푸시킨이라 평가했다. 그의 노래시는 현재 미국, 프랑스, 스웨덴,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안되어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