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발췌 동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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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1/09/28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91128857720
Categories 자연과학
Description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과는 다른 진화론인 개체의 필요에 의해 생물이 진화한다는 획득형질 이론을 담고 있다. 또한 독립된 과학으로서 생물학의 기반을 잡고, 심리학적 토대를 정립하는 데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의 이론은 용어의 해석이 애매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지만 이를 고려하고 보면, 생명에 대해 일생을 바쳐 진지하게 탐구하고, 이를 실증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한 사상가의 고뇌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Contents
머리말
서론

제1부 동물들의 특성, 유연관계, 조직화, 배치, 분류, 그리고 종에 대한 자연사적 고찰
제7장 생명체 조직화와 그들 부위를 변형시키는 원인으로서 동물의 작용 및 습성에 대한 환경의 영향과 생명체의 습성 및 작용의 영향에 대하여

제2부 생명의 물리적 요인, 생명 존재에 요구되는 조건, 생명운동을 자극하는 힘, 생명을 지닌 신체에 부여된 기능, 그리고 신체 내에 생명이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결과에 대한 고찰
서론
제1장 동물과 식물의 비교 검토, 그리고 무기체와 생명체의 비교
제2장 생명, 생명을 구성하는 것, 신체 내에서 생명의 존재에 핵심적인 조건들에 대하여
결론

제3부 여러 동물들에서 관찰되는 활동을 만들어내는 힘, 그리고 지적 활동을 일으키는 감각의 물리적 원인에 대한 고찰
서론
제8장 이해의 주요 행위들, 또는 나머지 것들이 그로부터 파생되는 첫 질서에 관하여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Author
장 바티스트 드 라마르크,이정희
장 바티스트 드 라마르크는 1744년 8월 1일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바장탱 르 프티에서 태어나 1829년 12월 18일 파리에서 생을 마쳤다.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에 잠정적 승인을 얻어 안치되었으나 1830년 혁명 당시 그의 묘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으며,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으나 다섯 명만이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라마르크는 모계 혈통으로 922∼923년 프랑스 임시 국왕이었던 로베르 1세의 자손이었으며, 소귀족 계급 출신이었지만 가난했다. 식물학과 음악에 많은 관심을 지녔던 그는 파리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의사가 되지는 않았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만나 함께 식물을 채집하게 되며, 다른 과학에도 관심을 지니면서 특히 식물학에 집중하여 쥐시외(Bernard Jussieu)와 함께 연구했다. 일부 동료 가운데 특히 고정설(fixsme)의 지지자였던 퀴비에에 맞서야 했으며, 정치권력에도 그리 밝지 못했다. 혁명 사상을 지지했던 그의 정치적 시각은 제정기나 왕정복고 당시의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두었고, 그가 택했던 직업들은 대개 명예직으로 보수가 매우 낮아서 일생 동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 직원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라마르크, 50세, 두 차례 결혼, 여섯 자녀, 곤충, 유충, 미생물 전공의 동물학 교수.”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무척추동물학을 포함한 동물학에 전념했다.
장 바티스트 드 라마르크는 1744년 8월 1일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바장탱 르 프티에서 태어나 1829년 12월 18일 파리에서 생을 마쳤다.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묘지에 잠정적 승인을 얻어 안치되었으나 1830년 혁명 당시 그의 묘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했으며, 여덟 명의 자식이 있었으나 다섯 명만이 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라마르크는 모계 혈통으로 922∼923년 프랑스 임시 국왕이었던 로베르 1세의 자손이었으며, 소귀족 계급 출신이었지만 가난했다. 식물학과 음악에 많은 관심을 지녔던 그는 파리의 은행에서 일하면서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의사가 되지는 않았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만나 함께 식물을 채집하게 되며, 다른 과학에도 관심을 지니면서 특히 식물학에 집중하여 쥐시외(Bernard Jussieu)와 함께 연구했다. 일부 동료 가운데 특히 고정설(fixsme)의 지지자였던 퀴비에에 맞서야 했으며, 정치권력에도 그리 밝지 못했다. 혁명 사상을 지지했던 그의 정치적 시각은 제정기나 왕정복고 당시의 분위기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두었고, 그가 택했던 직업들은 대개 명예직으로 보수가 매우 낮아서 일생 동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국립 자연사 박물관 직원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라마르크, 50세, 두 차례 결혼, 여섯 자녀, 곤충, 유충, 미생물 전공의 동물학 교수.”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무척추동물학을 포함한 동물학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