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에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 마을에서 홍력(洪?)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1742)에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나아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수학했다. 16세(1746)에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훗날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했다.
21세(1751) 여름에,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해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고 윤증의 주장에 동조했다.
24세(1754) 봄에, 김원행 문하생인 주도이(周道以)의 초상에 조문했으며 5월에 석실서원에서 김원행에게 ≪소학≫을 배웠다.
25세(1755)에 스승 김원행을 찾아온 박지원을 만났다. 훗날 홍대용이 중국을 다녀온 뒤 둘은 더욱 가깝게 교유했다.
26세(1756) 9월에 <봉래금사적(蓬萊禁事蹟)>을 지었다. 석실서원에서 황윤석(黃胤錫)을 만났다.
28세(1758)에 부친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는 데 따라가 나주 향약과 <권무사목(勸武事目)>에 대한 서문을 지었다.
29세(1759)에 전남 화순군 이서면의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한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교유하며 혼천의와 자명종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3년 후,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고 고향 집에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혼천의와 자명종을 보관했다.
32세(1762)에 부친이 환곡에 관한 일로 예천(醴泉)에 5년간 금고형에 처해졌다.
35세(1765) 11월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인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을 수행해 연경에 갔다.
36세(1766)에 연경에서 항주에서 온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을 만나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 6월, 돌아와 그간의 필담과 주고받은 서찰을 엮은 <건정동회우록(乾淨?會友錄)>과 <항전척독(杭傳尺牘)>을 완성했다.
37세(1767)에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해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냈다. 11월, 부친상을 당한 후 과거를 단념했다.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교유했다.
38세(1768)에 엄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냈다.
42세(1772) 7월에 스승 김원행이 사망했다.
43세(1773)에 ≪의산문답(醫山問答)≫과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했다.
44세(1774) 봄에, 이송(李淞)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繕工鑑監役),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에, 12월,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 侍直)에 임명되었다.
46세(1776) 3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다.
47세(1777) 7월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49세(1779) 12월에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다.
53세(1783) 5월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10월 23일에 중풍으로 사망했다. 12월, 청주 구미평(龜尾坪)에 장사 지냈고 박지원이 묘지명을 지었다.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에 충청도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 마을에서 홍력(洪?)과 청풍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1742)에 양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나아가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수학했다. 16세(1746)에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훗날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거문고의 명수’라고 칭찬했다.
21세(1751) 여름에, 윤증(尹拯)의 글을 읽고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련해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하고 윤증의 주장에 동조했다.
24세(1754) 봄에, 김원행 문하생인 주도이(周道以)의 초상에 조문했으며 5월에 석실서원에서 김원행에게 ≪소학≫을 배웠다.
25세(1755)에 스승 김원행을 찾아온 박지원을 만났다. 훗날 홍대용이 중국을 다녀온 뒤 둘은 더욱 가깝게 교유했다.
26세(1756) 9월에 <봉래금사적(蓬萊禁事蹟)>을 지었다. 석실서원에서 황윤석(黃胤錫)을 만났다.
28세(1758)에 부친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는 데 따라가 나주 향약과 <권무사목(勸武事目)>에 대한 서문을 지었다.
29세(1759)에 전남 화순군 이서면의 물염정(勿染亭)에 은거한 과학자 나경적(羅景績)을 찾아가 교유하며 혼천의와 자명종 등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3년 후, 혼천의와 자명종을 완성하고 고향 집에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혼천의와 자명종을 보관했다.
32세(1762)에 부친이 환곡에 관한 일로 예천(醴泉)에 5년간 금고형에 처해졌다.
35세(1765) 11월에 동지사(冬至使) 서장관인 작은아버지 홍억(洪檍)을 수행해 연경에 갔다.
36세(1766)에 연경에서 항주에서 온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 등을 만나 형제의 의리를 맺었다. 6월, 돌아와 그간의 필담과 주고받은 서찰을 엮은 <건정동회우록(乾淨?會友錄)>과 <항전척독(杭傳尺牘)>을 완성했다.
37세(1767)에 ≪해동시선(海東詩選)≫을 완성해 항주의 반정균에게 보냈다. 11월, 부친상을 당한 후 과거를 단념했다.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와 교유했다.
38세(1768)에 엄성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을 지어 보냈다.
42세(1772) 7월에 스승 김원행이 사망했다.
43세(1773)에 ≪의산문답(醫山問答)≫과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했다.
44세(1774) 봄에, 이송(李淞)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다.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繕工鑑監役), 돈령부 참봉(敦寧府參奉)에, 12월,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 侍直)에 임명되었다.
46세(1776) 3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에 임명되었다.
47세(1777) 7월에 태인현감(泰仁縣監)에 임명되었다.
49세(1779) 12월에 영천군수(榮川郡守)에 임명되었다.
53세(1783) 5월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 상소를 올렸다. 10월 23일에 중풍으로 사망했다. 12월, 청주 구미평(龜尾坪)에 장사 지냈고 박지원이 묘지명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