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 보우스님은 고려 말기 스님으로 태고(太古)는 호이다. 속성은 홍(洪)이며, 홍주 사람이다. 홍주 양근군에서 1301년에 태어났다. 13세에 회암사로 출가하였고, 26세에 승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수행하여 38세에 활연히 깨치고 그 경지를 게송으로 표현하였다.
그 후 1년간 부모를 모시고 지내다가 소요산 백운암과 삼각산 중흥사 등에 오래 머물렀다. 46세에 연경으로 가서 대관사에 머물고, 47세에 하무산 천호암에서 임제의 18대 손인 석공 청공화상을 친견하고 인가를 받았다.
이때 「태고암가」를 드리니 이에 발문을 써 주셨다. 다시 연경으로 돌아와 영녕선사에서 개당설법을 하고, 이때 중국에 와 있던 현릉(공민왕)을 만났다. 48세에 귀국한 후 곧 용문산 미원장의 소설암에서 지내다가 56세에 봉은선사에서 개당설법을 하고 1356년에 왕사(王師)로 추대되었다.
이후로 홍건적의 침입과 신돈의 중상 등으로 희양산, 가지산, 속리산 등으로 옮겨 지냈고, 69세에 다시 소설암으로 돌아왔으며, 신돈이 죽임을 당한 후 다시 국사로 추앙되었다. 그 후 영원사, 양산사 등에 잠깐씩 머물다가 82세 되는 겨울, 소설암에서 입적하셨다.
스님의 법문 내용은 주로 심지(心地)법문이다. 특히 공민왕을 위한 마음법문인 「심요(心要)」에서 보면 ‘부모가 낳아주기 전의 본래 모습인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을 자세히 살필 것과 어묵동정(語?動靜)에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자나 깨나 한결같은 경지인 ‘오매일여(寤寐一如)에 이르게 되면 크게 깨침에 가깝다고 하였다.
참선하는 납자들과 신도들에게 준 짧은 글 속에서도 역시 참선에 대한 법문을 하였는데, 특히 조주스님의 무(無)자 화두를 말씀하시고, 염불을 하면서도 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셨다.
한편 고려 말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어울려 승단의 개혁 등을 주창하였다. 홍건적의 난을 예견하고 성을 쌓았으며, 특히 도읍을 한양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내원당에서 행한 설법에서 당시 스님들의 시대상을 비판하였고, 왕사로 봉해진 뒤 원융부를 설치한 뒤에는 9산선문(九山禪門)을 일문(一門)으로 개편하려고 노력하였다.
백장청규와 치문경훈을 간행한 것도 승려의 기강을 새로이 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삼각산 중흥사를 중창하고 희양산 봉암선사를 중수하는 등 10여 곳에 절을 지었다.
무각(無覺)법사스님은 입산하여 20년간을 끊임없이 마음 깨닫는 수행에 정진하면서 보고 듣는 일이 많아진 현대인의 갈등과 방황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직 명상서적만을 집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으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주체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무의미하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저것 손대 보아도 우리가 자신을 알지 못하면 수박겉핥기처럼 방황과 갈등에 혼란 당할 수밖에 없다. 잠든 나를 일깨우기 위한 무각스님의 외침은 계속 연재되고 있으며, 마음에 관한 비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하고 폭넓게 설하면서 지성으로 번뜩이는 정신적인 처방으로 현대인을 위한 이정표를 세우다.
무각(無覺)법사스님은 입산하여 20년간을 끊임없이 마음 깨닫는 수행에 정진하면서 보고 듣는 일이 많아진 현대인의 갈등과 방황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직 명상서적만을 집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으로 손과 발을 움직이는 주체를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무의미하게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저것 손대 보아도 우리가 자신을 알지 못하면 수박겉핥기처럼 방황과 갈등에 혼란 당할 수밖에 없다. 잠든 나를 일깨우기 위한 무각스님의 외침은 계속 연재되고 있으며, 마음에 관한 비밀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하고 폭넓게 설하면서 지성으로 번뜩이는 정신적인 처방으로 현대인을 위한 이정표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