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이란 북쪽을 남쪽으로 알고 달리는 사람처럼 미혹함으로 인하여 착각에 빠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생사를 거듭하여 전전하는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전부가 무명의 늪에 빠진 것과 같다. 목숨을 받아 태어났다는 것은 무명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육신을 자신의 몸이라 하고 물질과 소리 등의 경계를 반연하여 생겨난 그림자를 자신의 마음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무명의 꿈을 꾸고 있음과 같다. 무명의 꿈을 꾸고 있으므로 삶과 죽음이 본래 없는 데도 허망하게 생멸을 보이는 것은 마치 허공에서 허공꽃이 생겨난 것과 같다.
10년 동안 관상학을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철학자가 모래 위에서 예사롭지 않은 발자국을 발견했다. 족상을 봐서는 분명 황제의 발자국인데 이런 시골 강가에 수행원도 없이 혼자 계신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고, 그렇다면 자신이 10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수고인가 싶어 발자국을 따라 갔다. 그리고 남루한 옷을 걸친 붓다를 발견했을 때 그는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관상은 분명 한 나라의 황제가 아니라 오대양 육대주를 다스리는 차크라바르틴의 상을 하신 분이 초라한 옷차림에 이처럼 후미진 마을에 그것도 혼자서·····
자신이 10년 동안 공부한 책들을 강물에 던지려고 다짐하고는 붓다께 다가가서 묻는다.
‘제가 배우기로 당신은 황제여야 합니다. 당신은 황제가 아니십니까,’
‘아니다.’
‘그럼 당신은 천상에 계시는 천인이십니까,’
‘아니다.’
‘그럼 인간을 교화하고 중생을 건지는 아라한이십니까,’
‘아니다.’
‘이제 저는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10년간 배운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러자 붓다가 말했다.‘그대는 돌아가 그대의 일을 하도록 해라. 나는 황제도 천인도 아라한도 아니다. 나는 아무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호흡하는 빈 그릇이다.’ 붓다만이 호흡하는 빈 그릇이 아니라 우리 역시도 호흡하고 맥박 뛰는 빈 그릇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경험에 기인하며, 또한 10분 후나 며칠 후 다가 올 걱정으로 불안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지금 현재로서는 육신이 스스로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도록 스스로 고쳐나가며, 심지어는 잠들어 의식이 없더라도 뒤척이는 것은 편한 자세를 취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현재는 육신이 알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아무런 불편과 혼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과거의 일로 인하여 내일 당할 걱정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는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고 하였다. 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인 집착도 없고 고통의 멸함도 없고, 고통을 멸하는 길도 없다고 뜻이다. 어째서 고통을 받고 있고 고통을 멸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가며 노력하고 있는데 고통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것인가, 육조 혜능대사가 어느 날 잠자리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러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돈 열 냥을 준비하여 이불 밑에 넣어 두고 잠이 들었다.
해능대사를 죽이라고 사주를 받은 그는 스님을 칼로 내리쳤으나 전혀 상처를 입지 않은 혜능대사는 돈 열 냥을 내어 주며 나는 전생에 자네한테 돈을 빚졌을 뿐 목숨 빚은 지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다. 이에 놀란 그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후일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육조단경에서 등장하는 이야기가 참으로 이와 같다면 혜능대사가 과거 생에 그 사람의 목숨을 해친 적이 없으므로 아무리 칼로 내리쳐도 죽을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다만 돈 열 냥만을 빚졌기에 그것을 갚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동차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더라도 개중에는 죽지 않고 다치기만 한 사람들은 과거 생에 남의 목숨 빚을 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육조단경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를 거짓이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선과 악이란 과거 생으로부터 전해오는 업력으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에게 악한 일을 저질렀을 때, 만일 그것이 과거 생에서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행위를 갚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죄도 없고 악함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음덕을 입은 탓으로 그것을 갚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라면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란 다만 과거 생에 지어놓은 인과를 따라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계의 법칙에 따른 응분의 움직임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행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고 그에 대한 고통으로 괴로움을 느낀다 해도, 실제로는 죄를 지은 자도 없고 고통을 받는 자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