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지록』의 요점을 간단히 정리하면 네 가지로 간추릴 수가 있다. 첫째 인간의 가치는 ‘남을 위해 어느 정도 사는가!’에 달려 있다. 둘째 지위와 명예 그리고 외관상의 성공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셋째 남을 따스하게 대해주는 정(情)과 배려하는 서(恕) 그리고 ‘가진 자의 사회적 의무’가 우주만물을 하나로 만드는 ‘사회 통합의 주춧돌’이다. 넷째 그 무슨 일이든지 사람을 상대로 하지 말고, 하늘을 상대로 하라. 인간은 환경에 의해 변화를 하기도 하지만 그 환경을 좋은 쪽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것은 뜻(志)을 지닌 인간이기에 가능하다. 뜻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 훌륭한 스승과 친구를 찾아 은혜를 입고, 그리고 공부하며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의식적으로 창조할 줄 안다. 인생을 좋게 하는 것도 나쁘게 하는 것도 모두 이 ‘뜻’ 나름이라는 것을 『언지록』은 충분히 가르쳐주고 있다.
가령 『언지록』 제33조에서는 “뜻이 있는 사람은 예리한 칼날과 같아 사악한 것들이 꽁무니를 뺀다. 뜻이 없는 사람은 둔한 칼과 같아 어린 아이들도 업신여기고 깔본다.”라고 하였다. 이는 함석헌 선생이 50여 년 전 『사상계』에서 “뜻이 있으면 사람, 뜻이 없으면 사람 아니다.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뜻도 모르면 개요 돼지다.”라고 하며 늘 강조하던 그 “뜻이 있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잠언을 떠오르게 한다.
『언지록』에는 ‘뜻(志)’이라는 말이 계속하여 등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뜻은 과연 무엇일까? ‘입신출세’라든가 ‘입신공명’ 혹은 ‘부자아빠 되기’ 등등, 세속적인 함의일까? 물론 뜻을 품고 한평생을 열심히 살다 보면 그 결과로서 입신출세를 하가나 부자아빠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뜻(志)’의 본래 의미는 ‘마음(心)이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意志)’이다. 달리 말해 ‘존양(存養, 양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름)’, 거경(居敬, 늘 마음을 바르게 가져 덕성을 닦음), 함양과 체찰(體察, 성찰) 등등의 마음공부로 인격적으로 품위가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뜻을 일컫는다.
『언지록』이라는 책 제목의 출전으로 생각되는 『논어』에서도, 자로가 공자에게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愿聞子之志).”라고 하자, 공자는 “노인들은 편안하게 해주고, 벗들은 신의를 갖도록 해주고, 젊은이들은 감싸 보살펴 주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언지록』에서 ‘뜻’은 야망을 가져라, 대망을 품어라, 입신출세 하여라, 부자가 되어라 하는 풍으로 ‘명리와 금전 등에 관한 이기적 욕망’을 북돋는 말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몸소 실천해 이루어야만 하는 목표·목적·결심’ 등을 가리킨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사랑과 헌신’일 것이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자비와 해탈’일 것이며, 유교적 수신서인 『언지록』은 당연히 인의예지(仁義禮智)라든가, 덕(德), 경(敬), 성(誠), 충(忠), 효(孝), 신(信), 서(恕), 격물치지(格物致知) 등등을 가리킨다.
그래서 『언지록』에서 가장 출전이 많은 것이 사서(四書)에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순이고, 오경(五經)에서는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순이다. 이 밖에 병가와 도가의 책들도 거론되는 등 백가제자의 설이 모두 인용되고 있다. 저자의 학문세계는 유학을 주로 하고 그 밖에 제자백가의 학설에까지 미치고 있다.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많이 인용된 동양 고전은 『논어』이고 그 다음으로 『맹자』, 『역경』, 『서경』, 『중용』 등이다. 또한 『역경』에 정통하여, 이 책의 곳곳에서 역리로 사람의 처세에 관한 지혜를 깨닫게 해준다.
특히 저자는 ‘양주음왕(陽朱陰王, 양명학陽明?을 신봉하면서 표면적으로 주자학자인 척함)’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언지록』은 지행합일 즉 ‘앎과 행동은 함께 굴러가는 두 바퀴’라는 것을 특히나 강조하는 왕양명의 학문과 사상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다. 위에서 열거한 고전 외에 송·원·명·청 시대의 유학과 중국사, 게다가 일본의 유학 등도 언급하며 활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지록』은 짧은 잠언 형식으로 쓴 동양의 거의 모든 사상사에 대한 수상록이자 명상록 그리고 주석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Contents
【서문】 『언지록』 출간에 부쳐
짧은 글, 큰 뜻으로 천고의 심금을 울리다
제1부『언지록』
생사·우주·정치·충효 등에 관한 사색이 총 246조로 이루어져 있다. 사토 잇사이가 42세이던 1813년 5월 26일부터 『언지록』을 쓰기 시작하여, 이후 10여 년간 수시로 쓰다가 1824년에 간행하였다.
제2부『언지후록』
학문·인생·인간·문학·도덕 등에 대해 머리에 떠도는 수상을 255조항에 걸쳐 서술하였다. 1828년 9월 9일 사토 잇사이 57세에 쓰기 시작하여, 이후 대략 10년간 썼고, 다음 권인 『언지만록』과 함께1 850년에 간행하였다.
제3부『언지만록』
학문·전술·정치·치세·경영 등에 관한 수상을 292장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1838년 67세 정월부터 1849년 78세 2월까지 썼다. 대략 12년간 쓴 셈이다.
제4부『언지질록』
우주·생사·수양·교육 등에 관한 수상을 340조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1851년, 80세 5월 5일에 쓰기 시작하였고, 1853년에 간행되었으니, 대략 2년 채 못 되어서 탈고를 하였다.
【옮긴이 해제】
거의 모든 동양의 지혜를 아포리즘화한 좌우명의 절창
【부록】 리더를 위한 일본 최고의 인재 활용 비서秘書
중직심득개조重職心得箇條
Author
사토 잇사이,노만수
일본 유학의 대성자로 일컬어지는 ‘백세(百世)의 홍유(鴻儒)’ 사토 잇사이는 에도 시대 최고 학문 기관인 쇼헤이코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밤에 유흥가로 나가 취객을 때리고 도망치거나 한 제법 난폭한 사무라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될 무렵 분연히 뜻을 세우고 수양에 전념하여 이른 장년기에 학문이 원만한 군자로 불리게 되었다. 나이 70세였던 1841년 11월 쇼헤이코의 주칸이 되었고, 그의 학덕은 날로 높아져 세상의 태산북두로 불리며 경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무렵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에게 「역경」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에게 강설을 청하는 다이묘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막부의 요청으로 시무책을 올리기도 하였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될 때에는 하야시 후쿠사이를 보좌해 외교문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그가 살아 있을 적에 출판되어 대중들이 접할 수 있었던 「언지록」과 문집 「애일루문시」를 비롯해 90여 권이 있다. 1859년 여름 무렵 병에 걸려 9월 23일 밤에 쇼헤이코 관사에서 향년 8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일본 유학의 대성자로 일컬어지는 ‘백세(百世)의 홍유(鴻儒)’ 사토 잇사이는 에도 시대 최고 학문 기관인 쇼헤이코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 밤에 유흥가로 나가 취객을 때리고 도망치거나 한 제법 난폭한 사무라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어른이 될 무렵 분연히 뜻을 세우고 수양에 전념하여 이른 장년기에 학문이 원만한 군자로 불리게 되었다. 나이 70세였던 1841년 11월 쇼헤이코의 주칸이 되었고, 그의 학덕은 날로 높아져 세상의 태산북두로 불리며 경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 무렵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德川家慶)에게 「역경」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에게 강설을 청하는 다이묘들이 수십 명에 달했다. 막부의 요청으로 시무책을 올리기도 하였고,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될 때에는 하야시 후쿠사이를 보좌해 외교문서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그가 살아 있을 적에 출판되어 대중들이 접할 수 있었던 「언지록」과 문집 「애일루문시」를 비롯해 90여 권이 있다. 1859년 여름 무렵 병에 걸려 9월 23일 밤에 쇼헤이코 관사에서 향년 8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