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8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페로 동화집』의 작가로 유명하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왕실에서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며 ‘신구논쟁’에서 근대파를 대표했다. 은퇴 후 자녀 교육을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한 그는 1697년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신데렐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등의 작품들이 수록된 『페로 동화집』을 출간한다.
이 책은 민담을 텍스트로 정리한 세계 최초의 동화집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페로는 ‘동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동화들은 “옛이야기를 문학의 한 장르로 당당히 끌어올렸다.”라는 찬사를 받으며 발레,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로 재탄생했고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몰리에르나 코르네유 등 당대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보다 명성이 훨씬 미약했지만 그의 집안은 거의 사단이라고 불릴만큼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페로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가 되기도 했으나 법조인으로 남지 않았다. 그는 여러 작품을 발표했으나 문단의 중심에 진입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교계와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페로는 1660년에 두 편의 찬양 시를 발표해 왕실 측근들의 관심을 받는다. 콜베르에 의해 1663년 총무의 직책에 임명된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이래 궁정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콜베르의 비호와 배려로 페로는 왕실과 군주의 영광을 고취하는 다양한 임무에 종사한다.
1668년 콜베르의 추천으로 건설차관에 오른 샤를 페로는 1671년, 드디어 한림원 회원에 피선되어 공직 생활에서 얻은 명성에 방점을 찍는다. 한림원 회원으로 피선된 이듬해 44세가 된 페로는 당시 19세에 불과한 규수 마리 기숑과 결혼해 3남 1녀를 두는데, 그중 막내이자 셋째 아들인 피에르는 훗날 부친의 동화집 출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던 페로는 불과 6년 만에 부인과 사별해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자식 네 명을 양육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1683년 콜베르의 사망으로 페로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넌다. 20년 넘게 권세를 누린 콜베르 덕분에 정치권에 밀착했던 페로는 문학과 자녀의 양육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일단 회원이 되면 종신으로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한림원에서 페로는 프랑스 문단과 지성계를 양분시키는 일대 사건을 도발한다. 1687년 1월 27일, 한림원 회원들 앞에서 <위대한 루이 왕의 세기>라는 제하의 시를 낭송한다. 르네상스 시대 후 학문과 예술에 절대적인 모방의 대상이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 못지않게 당대의 작가들 또한 매우 높은 수준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페로의 주장은 신구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발전에 기초하기 때문에 당대의 문학과 예술, 과학과 기술의 성과는 고대인들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부알로를 위시해 라신, 라 퐁텐 등 작가로서의 위상이 훨씬 두드러졌던 인사들은 고대의 작가들이야말로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 모델을 제시했다고 주장하며 근대파와 대립했다. 1694년 8월 30일, 아르노의 중재로 논쟁은 종식되었지만, 고대 문학의 절대적 권위에서 해방을 시도하며 발전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준 근대파의 진보적 역사관은 다음 세기에 출현할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신구논쟁의 파장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1697년 페로는 셋째 아들 피에르의 이름으로 『지난 시절의 이야기 혹은 콩트』를 간행해 독자들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받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공직자이자 문인이었던 페로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일념으로 『회상록』의 집필을 시작하지만 그 출판을 보지 못하고 1703년 5월에 유명을 달리한다. 페로가 편찬한 동화집은 지금도 지구촌 곳곳 어린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프랑스 최고의 판타지 문학을 남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28년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17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페로 동화집』의 작가로 유명하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왕실에서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활동하며 ‘신구논쟁’에서 근대파를 대표했다. 은퇴 후 자녀 교육을 위해 동화를 쓰기 시작한 그는 1697년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신데렐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등의 작품들이 수록된 『페로 동화집』을 출간한다.
이 책은 민담을 텍스트로 정리한 세계 최초의 동화집으로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페로는 ‘동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동화들은 “옛이야기를 문학의 한 장르로 당당히 끌어올렸다.”라는 찬사를 받으며 발레,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분야로 재탄생했고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사람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몰리에르나 코르네유 등 당대 함께 활동했던 작가들보다 명성이 훨씬 미약했지만 그의 집안은 거의 사단이라고 불릴만큼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페로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가 되기도 했으나 법조인으로 남지 않았다. 그는 여러 작품을 발표했으나 문단의 중심에 진입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교계와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페로는 1660년에 두 편의 찬양 시를 발표해 왕실 측근들의 관심을 받는다. 콜베르에 의해 1663년 총무의 직책에 임명된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한 이래 궁정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콜베르의 비호와 배려로 페로는 왕실과 군주의 영광을 고취하는 다양한 임무에 종사한다.
1668년 콜베르의 추천으로 건설차관에 오른 샤를 페로는 1671년, 드디어 한림원 회원에 피선되어 공직 생활에서 얻은 명성에 방점을 찍는다. 한림원 회원으로 피선된 이듬해 44세가 된 페로는 당시 19세에 불과한 규수 마리 기숑과 결혼해 3남 1녀를 두는데, 그중 막내이자 셋째 아들인 피에르는 훗날 부친의 동화집 출판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던 페로는 불과 6년 만에 부인과 사별해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자식 네 명을 양육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1683년 콜베르의 사망으로 페로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넌다. 20년 넘게 권세를 누린 콜베르 덕분에 정치권에 밀착했던 페로는 문학과 자녀의 양육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일단 회원이 되면 종신으로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한림원에서 페로는 프랑스 문단과 지성계를 양분시키는 일대 사건을 도발한다. 1687년 1월 27일, 한림원 회원들 앞에서 <위대한 루이 왕의 세기>라는 제하의 시를 낭송한다. 르네상스 시대 후 학문과 예술에 절대적인 모방의 대상이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 못지않게 당대의 작가들 또한 매우 높은 수준의 작품을 발표했다는 페로의 주장은 신구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발전에 기초하기 때문에 당대의 문학과 예술, 과학과 기술의 성과는 고대인들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부알로를 위시해 라신, 라 퐁텐 등 작가로서의 위상이 훨씬 두드러졌던 인사들은 고대의 작가들이야말로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 모델을 제시했다고 주장하며 근대파와 대립했다. 1694년 8월 30일, 아르노의 중재로 논쟁은 종식되었지만, 고대 문학의 절대적 권위에서 해방을 시도하며 발전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준 근대파의 진보적 역사관은 다음 세기에 출현할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신구논쟁의 파장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1697년 페로는 셋째 아들 피에르의 이름으로 『지난 시절의 이야기 혹은 콩트』를 간행해 독자들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받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공직자이자 문인이었던 페로는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겠다는 일념으로 『회상록』의 집필을 시작하지만 그 출판을 보지 못하고 1703년 5월에 유명을 달리한다. 페로가 편찬한 동화집은 지금도 지구촌 곳곳 어린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점에서 그는 프랑스 최고의 판타지 문학을 남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