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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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09/03/30
Pages/Weight/Size 155*208*20mm
ISBN 9788993632040
Categories 에세이
Description
국민가수 이미자, 노래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그림에세이

‘국민가수 이미자’가 노래 인생 50주년을 기념하여 내놓은 책으로, 잊지 못할 옛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풀어놓았다. 가요계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가 털어놓는 일화들은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가슴 찡한 여운을 준다. 겹치기 공연으로 밥 먹을 틈도 없어 차 안에서 김밥이나 주먹밥으로 끼니를 대충 때우던 시절 이야기, 가수 초년생 시절 장기 지방공연을 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몰래 서울로 도망쳐 왔다가 당시 공연단장이었던 현인 선생님한테 잘못을 빌고 다시 내려가 나머지 공연을 했던 일이며, 자신의 대표곡들이 줄줄이 금지곡이 되었던 가슴 아픈 사연과 이미자-박춘석 명콤비의 탄생 과정, 노래나 모습이 촌스럽기 짝이 없다고 평가를 받는 그가 맨 처음 호텔 디너쇼를 하게 된 과정 등 한결같은 길을 걸어오는 과정에서 그가 겪었던 아픔과 상처, 그리고 대중가요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Contents
감사의 글

내 삶의 이유 있음은
아, 시대는 이렇게 변해 가고 있구나
‘말’이란 얼마나 중요하고 무서운 것인가
눈물바다가 된 연병장
불의의 사고
가슴 아픈 나의 금지곡
잊을 수 없는 겹치기 공연
눈물의 오프닝 가수 시절
60년대 선후배 간의 갈등?
멋쟁이 현인 선생님과의 추억
박춘석-이미자 명콤비의 탄생
나는 ‘트로트의 여왕’이 아니다
첫 번째 디너 쇼
「동백 아가씨」 드디어 해금되다
꿈에 그리던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다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가요
마지막 잎새처럼 떠나간 벗, 배호
아름다운 섬, 흑산도와의 인연

천경자의 이미자론
Author
이미자
트로트 여자가수 1941년 서울 용산 출생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여가수. 각종 조사에서 여자 가수부문에서는 단연 20세기 최고가수로 꼽히며 남자까지 통틀어도 언제나 톱의 위치에 우뚝 서는 가요사의 거목이다. 전성기 때는 애가(哀歌)라는 의미의 ‘엘리지의 여왕’으로 불렸다. 가난과 전쟁통에 7년 만에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만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천부적인 노래솜씨로 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인 HLKZ의 아마추어 노래자랑 프로인 ‘예능 로터리’에서 18살의 미소녀로서 1등을 차지, 화제를 모으며 데뷔했다. 이듬해 학교를 졸업과 함께 ‘열아홉 순정’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당시 LD 판으로는 믿기 어려운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전해질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후 ‘님이라 부르리까’와 다섯 살 어린 아이의 납치를 안타깝게 노래한 나화랑의 곡 ‘두형이를 돌려줘요’도 연속 히트했다. 신인가수임에도 불구하고 5.16 군사쿠데타 직후 ‘연예인위문단’ 시절, ‘나룻배 처녀’의 최숙자(崔淑子)가 한창 인기정상을 누렸던 시점에도 최숙자를 능가하는 인기선풍을 구가했다. 이미자는 특별한 기교와 장치 없이 가슴에서부터 곧게 솟아 나오는 진솔한 소리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듣는 사람들의 한과 가슴 속 상처를 달래고, 위로하면서 ‘엘리지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데뷔한 지 5년 후인 1964년에는 가요사의 기념비적인 백영호(白映湖) 작곡의 ‘동백아가씨’로 폭발적 호응을 얻으면서 마침내 ‘이미자시대’를 열었다. 이 곡으로 이미자는 트로트를 위시해 가요계 전체를 평정했지만 불행히도 그 영광은 곧 한일교류 시점에 불붙은 왜색 시비에 걸려 30년 가까이 방송은 물론 음반제작과 판매 일체가 금지되는 비극으로 바뀌었다. 이 곡말고도 1967년에도 ‘섬마을 선생님’, 그리고 다시 1969년 ‘기러기 아빠’도 금지사슬에 묶여버렸다. 이 곡들이 금지된 사유는 지금까지 왜색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자는 이에 대해 1999년 한 시사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내가 소속된 지구레코드사의 대중가요 시장독점을 시기한 다른 레코드업계의 장난, 즉 라이벌 회사들이 꾸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수의 생명에 치명타였던 금지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미자는 백영호(白映湖)가 쓴 곡들인 ‘울어라 열풍아’(1965년) ‘지평선은 말이 없다’(1966년) ‘빙점’(1967년) ‘서울이여 안녕’(1968년) ‘첫날 밤 갑자기’(1969년) ‘아씨’(TBC 드라마 주제곡.1970년) 그리고 손석우(孫夕友) 작곡의 ‘석양의 밀감 밭’(1967년) ‘사랑했는데’(1968년) 등 변함 없이 인기 곡을 쏟아냈다. 박춘석(朴椿石)과 콤비를 이루면서 한층 그녀의 진가는 두드러졌다. ‘진도아리랑’(1966년) ‘흑산도아가씨’ ‘그리움은 가슴마다’(1967년) ‘황혼의 블루스’ ‘아네모네’(1968년) ‘한번 준 마음인데’(1969년)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공할 연속 히트행진을 펼쳤다. “이미자는 한해에도 두서너 곡씩,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한다”는 말이 나왔다. 1970년대에도 박춘석 콤비와의 히트 퍼레이드는 계속되어 ‘사랑합니다’ ‘삼백리 한려수도’(1972년) ‘낭주골 처녀’(1973년) ‘정든 섬’(1974년) ‘모정’(1978년)이 줄줄이 히트했으며 백영호 곡 ‘그때가 옛날’(1971년) ‘떠난 사람’(1975년)도 호응을 얻었다. 중반기에는 고봉산(高峰山)과 호흡을 맞춘 곡인 ‘여자의 마음’(1973년) ‘안 오실까 봐’(1975년) ‘섬 처녀’ ‘꽃씨’(1976년)가 히트반열에 올랐다. 활동 40년 동안 2000곡 이상을 취입해 발표했으며(한국 기네스북에 오른 내용은 1990년까지 2063곡) 그 가운데 라디오 전파를 타 애청되거나 판매상위권에 오른 히트곡이 최소한 400여 곡에 달했다. 본인도 취입한 곡은 물론 히트한 곡을 제대로 나열하지 못할 정도. MBC 10대 가수 상도 무려 11년 간이나 연속 수상했고(그 중 가수왕도 3번) 1967년 문화공보부 무궁화훈장을 비롯해 굵직한 상도 100여 차례나 받았다. 노래에 관한 한 언제나 화려한 수식어와 평단의 찬사가 계속됐지만 1970년대 말부터는 하춘화, 1980년대에는 김연자와 주현미 등 신진 세력에게 트로트 여왕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가요관계자들은 이의 없이 20세기 최고가수로 이미자를 꼽는다. 1989년에는 대중예술에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가수생활 30주년 기념공연을 가졌으며 다시 10년이 지난 1999년 10월 역시 세종문화회관에서 ‘동백아가씨, 이미자의 노래인생 40년’이란 제목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트로트 여자가수 1941년 서울 용산 출생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여가수. 각종 조사에서 여자 가수부문에서는 단연 20세기 최고가수로 꼽히며 남자까지 통틀어도 언제나 톱의 위치에 우뚝 서는 가요사의 거목이다. 전성기 때는 애가(哀歌)라는 의미의 ‘엘리지의 여왕’으로 불렸다. 가난과 전쟁통에 7년 만에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만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천부적인 노래솜씨로 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인 HLKZ의 아마추어 노래자랑 프로인 ‘예능 로터리’에서 18살의 미소녀로서 1등을 차지, 화제를 모으며 데뷔했다. 이듬해 학교를 졸업과 함께 ‘열아홉 순정’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이 노래는 나오자마자 당시 LD 판으로는 믿기 어려운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전해질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후 ‘님이라 부르리까’와 다섯 살 어린 아이의 납치를 안타깝게 노래한 나화랑의 곡 ‘두형이를 돌려줘요’도 연속 히트했다. 신인가수임에도 불구하고 5.16 군사쿠데타 직후 ‘연예인위문단’ 시절, ‘나룻배 처녀’의 최숙자(崔淑子)가 한창 인기정상을 누렸던 시점에도 최숙자를 능가하는 인기선풍을 구가했다. 이미자는 특별한 기교와 장치 없이 가슴에서부터 곧게 솟아 나오는 진솔한 소리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듣는 사람들의 한과 가슴 속 상처를 달래고, 위로하면서 ‘엘리지의 여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데뷔한 지 5년 후인 1964년에는 가요사의 기념비적인 백영호(白映湖) 작곡의 ‘동백아가씨’로 폭발적 호응을 얻으면서 마침내 ‘이미자시대’를 열었다. 이 곡으로 이미자는 트로트를 위시해 가요계 전체를 평정했지만 불행히도 그 영광은 곧 한일교류 시점에 불붙은 왜색 시비에 걸려 30년 가까이 방송은 물론 음반제작과 판매 일체가 금지되는 비극으로 바뀌었다. 이 곡말고도 1967년에도 ‘섬마을 선생님’, 그리고 다시 1969년 ‘기러기 아빠’도 금지사슬에 묶여버렸다. 이 곡들이 금지된 사유는 지금까지 왜색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자는 이에 대해 1999년 한 시사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내가 소속된 지구레코드사의 대중가요 시장독점을 시기한 다른 레코드업계의 장난, 즉 라이벌 회사들이 꾸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수의 생명에 치명타였던 금지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미자는 백영호(白映湖)가 쓴 곡들인 ‘울어라 열풍아’(1965년) ‘지평선은 말이 없다’(1966년) ‘빙점’(1967년) ‘서울이여 안녕’(1968년) ‘첫날 밤 갑자기’(1969년) ‘아씨’(TBC 드라마 주제곡.1970년) 그리고 손석우(孫夕友) 작곡의 ‘석양의 밀감 밭’(1967년) ‘사랑했는데’(1968년) 등 변함 없이 인기 곡을 쏟아냈다. 박춘석(朴椿石)과 콤비를 이루면서 한층 그녀의 진가는 두드러졌다. ‘진도아리랑’(1966년) ‘흑산도아가씨’ ‘그리움은 가슴마다’(1967년) ‘황혼의 블루스’ ‘아네모네’(1968년) ‘한번 준 마음인데’(1969년)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공할 연속 히트행진을 펼쳤다. “이미자는 한해에도 두서너 곡씩,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한다”는 말이 나왔다. 1970년대에도 박춘석 콤비와의 히트 퍼레이드는 계속되어 ‘사랑합니다’ ‘삼백리 한려수도’(1972년) ‘낭주골 처녀’(1973년) ‘정든 섬’(1974년) ‘모정’(1978년)이 줄줄이 히트했으며 백영호 곡 ‘그때가 옛날’(1971년) ‘떠난 사람’(1975년)도 호응을 얻었다. 중반기에는 고봉산(高峰山)과 호흡을 맞춘 곡인 ‘여자의 마음’(1973년) ‘안 오실까 봐’(1975년) ‘섬 처녀’ ‘꽃씨’(1976년)가 히트반열에 올랐다. 활동 40년 동안 2000곡 이상을 취입해 발표했으며(한국 기네스북에 오른 내용은 1990년까지 2063곡) 그 가운데 라디오 전파를 타 애청되거나 판매상위권에 오른 히트곡이 최소한 400여 곡에 달했다. 본인도 취입한 곡은 물론 히트한 곡을 제대로 나열하지 못할 정도. MBC 10대 가수 상도 무려 11년 간이나 연속 수상했고(그 중 가수왕도 3번) 1967년 문화공보부 무궁화훈장을 비롯해 굵직한 상도 100여 차례나 받았다. 노래에 관한 한 언제나 화려한 수식어와 평단의 찬사가 계속됐지만 1970년대 말부터는 하춘화, 1980년대에는 김연자와 주현미 등 신진 세력에게 트로트 여왕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가요관계자들은 이의 없이 20세기 최고가수로 이미자를 꼽는다. 1989년에는 대중예술에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가수생활 30주년 기념공연을 가졌으며 다시 10년이 지난 1999년 10월 역시 세종문화회관에서 ‘동백아가씨, 이미자의 노래인생 40년’이란 제목의 무대가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