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십력(熊十力, 1885-1968)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황강현(黃岡縣)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계지(繼智)·승항(升恒)이고, 호는 자진(子眞)이며, 만년에는 자칭 칠원노인(漆園老人)이라고 하였다. 40세에 스스로 십력(十力)으로 개명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남의 집 소를 키우는 일을 하며 부친의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배웠다. 1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큰형을 좇아 농사일을 하며 공부했고, 16세 이후에는 홀로 학문을 연마하며 진백사(陳白沙)·왕부지(王夫之)·고염무(顧炎武) 등의 책을 읽고, 혁명의 길로 나가겠다고 결심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포기했다. 18세 때(1902년) 무창(武昌)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1911년에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이후에 손중산(孫中山)을 좇아서 원세개의 북양군벌(北洋軍閥)에 반대하는 호국(護國)·호법(護法) 전쟁에 참가했다. 그 후 34세(1918년)에 웅십력은 “당인들이 당권과 이익만을 다투니, 혁명은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탄식하며, “진정한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에 있다.”는 점을 깨닫고 마침내 학문의 길로 나섰다. 1920년 가을 절친한 친구인 양수명(梁漱溟)의 소개로 구양경무(歐陽竟無)의 남경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에서 2년 동안 불교를 연구했으며, 1922년 겨울 북경대 총장인 채원배의 초빙으로 북경대 교수가 되었다.
1923년에 『신유식론(新唯識論)』 초고를 쓰기 시작해서 1932년 문언본 『신유식론』을 출판했고, 이어서 『파?파신유식론?(破?破新唯識論?)』·『불학명상통석(佛學名相通釋)』을 발표했다. 항일전쟁기간에는 사천으로 피난 가서 마일부(馬一浮)·양수명이 주관하는 복성서원(復性書院)과 면인서원(勉仁書院)에서 강의하다가 1947년 북경대로 돌아왔다. 1940년대에 웅십력은 어체본 『신유식론』·『십력어요(十力語要)』·『독경시요(讀經示要)』·『십력어요초독(十力語要初讀)』 등을 펴냈고, 1950년 이후에는 『논육경(論六經)』·『원유(原儒)』·『체용론(體用論)』·『명심편(明心篇)』·『건곤연(乾坤衍)』 등을 출판했다. 특히 1956년에 완성한 『원유』는 “육경이 나를 주석한다.[六經注我]”는 방식으로 웅십력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유학 경전과 유학사를 새롭게 해석한 중요한 저술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말년의 웅십력은 반동복고주의자라고 낙인찍혀 많은 비판과 고초를 당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중국문화와 인간본성을 훼손한다고 항거하여 단식투쟁하는 도중에 결국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84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체용불이(體用不二)’·‘심물불이(心物不二)’·‘흡벽성변(翕闢成變)’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철학은 현대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의 기틀을 세웠으며, 그것은 이후 당군의·서복관·모종삼 등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웅십력(熊十力, 1885-1968)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황강현(黃岡縣)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계지(繼智)·승항(升恒)이고, 호는 자진(子眞)이며, 만년에는 자칭 칠원노인(漆園老人)이라고 하였다. 40세에 스스로 십력(十力)으로 개명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남의 집 소를 키우는 일을 하며 부친의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배웠다. 1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큰형을 좇아 농사일을 하며 공부했고, 16세 이후에는 홀로 학문을 연마하며 진백사(陳白沙)·왕부지(王夫之)·고염무(顧炎武) 등의 책을 읽고, 혁명의 길로 나가겠다고 결심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포기했다. 18세 때(1902년) 무창(武昌)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1911년에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이후에 손중산(孫中山)을 좇아서 원세개의 북양군벌(北洋軍閥)에 반대하는 호국(護國)·호법(護法) 전쟁에 참가했다. 그 후 34세(1918년)에 웅십력은 “당인들이 당권과 이익만을 다투니, 혁명은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탄식하며, “진정한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에 있다.”는 점을 깨닫고 마침내 학문의 길로 나섰다. 1920년 가을 절친한 친구인 양수명(梁漱溟)의 소개로 구양경무(歐陽竟無)의 남경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에서 2년 동안 불교를 연구했으며, 1922년 겨울 북경대 총장인 채원배의 초빙으로 북경대 교수가 되었다.
1923년에 『신유식론(新唯識論)』 초고를 쓰기 시작해서 1932년 문언본 『신유식론』을 출판했고, 이어서 『파?파신유식론?(破?破新唯識論?)』·『불학명상통석(佛學名相通釋)』을 발표했다. 항일전쟁기간에는 사천으로 피난 가서 마일부(馬一浮)·양수명이 주관하는 복성서원(復性書院)과 면인서원(勉仁書院)에서 강의하다가 1947년 북경대로 돌아왔다. 1940년대에 웅십력은 어체본 『신유식론』·『십력어요(十力語要)』·『독경시요(讀經示要)』·『십력어요초독(十力語要初讀)』 등을 펴냈고, 1950년 이후에는 『논육경(論六經)』·『원유(原儒)』·『체용론(體用論)』·『명심편(明心篇)』·『건곤연(乾坤衍)』 등을 출판했다. 특히 1956년에 완성한 『원유』는 “육경이 나를 주석한다.[六經注我]”는 방식으로 웅십력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유학 경전과 유학사를 새롭게 해석한 중요한 저술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말년의 웅십력은 반동복고주의자라고 낙인찍혀 많은 비판과 고초를 당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중국문화와 인간본성을 훼손한다고 항거하여 단식투쟁하는 도중에 결국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84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체용불이(體用不二)’·‘심물불이(心物不二)’·‘흡벽성변(翕闢成變)’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철학은 현대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의 기틀을 세웠으며, 그것은 이후 당군의·서복관·모종삼 등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