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문 취향, 낭만적 감상성, 부르주아, 서구 동경, 소녀 감성……. 오랜 세월 여성 작가들의 글에 따라붙어온 수식어들이다. ‘문학소녀’라는 말도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역사의식’이 없으며, ‘감상주의’에 치우쳐 있는 ‘미숙한 글’이라는 등의 온갖 폄하를 응축한 것 같은 단어다. 그리고 전혜린은 그런 ‘부잣집 철부지 문학소녀’의 대명사로 가장 자주 불려나왔던 인물이다. 박정희는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이런 교양주의를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의 소녀”라 부르며 “피와 땀과 눈물을 모르는, 노동하지 않는 자”, “우리의 적”으로 지목함으로써 전혜린, 문학소녀를 구악(舊惡)이자 적폐로 상징화하기도 했다. 온통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남발하고, 한국에 발을 딛고도 유럽의 어딘가를 고향처럼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는 자기 자신에게 몰두했던 전혜린의 글은 많은 여성들에게 책 읽는 사람으로서 자의식을 키우게 만든 출발점이지만, 황급히 잊고 극복해야 할 ‘흑역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문학소녀』에서 그 스스로 ‘읽고 쓰는 여성’인 저자 김용언은 전혜린을 경유해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읽기와 쓰기가 폄훼되어온 기나긴 역사를 파헤친다. 1920~30년대 ‘여류 작가’들이 글을 쓴다는 사실만으로 신기한 취급을 받으며 남성 평자들에게 멋대로 논평할 대상이 되곤 했던 풍경을 환기시키고, 1960년대 여학생 대상의 잡지에서 “지나치게 감상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소녀다움을 잃어서도 안 되는” 이중규범을 발견한다. 걸출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나혜석조차 「이혼고백장」에서 가부장제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격심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가족과 사회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채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여성 작가는 작품이 아닌 ‘스캔들’로 소비되기 일쑤였다. 잡지 《신여성》에는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 《신여자》 주간으로 활약했던 김원주 등 여성 문인들의 온갖 사생활과 뜬소문을 폭로하며 깎아내리는 코너 ‘색상자’가 있을 정도였다. 1930년대부터 등장한 강경애, 모윤숙, 최정희 등 ‘2세대 여류 문사’들은 수적으로 늘어났지만 여류에 대한 편견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소녀 문단”, “여류라는 프레미엄”, “지나친 섬세 감각이라는 한계성” 등 이 시기 여성 문인들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범주화한 남성 지식인들의 언어를 자세히 살펴본다. 한국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과거를 추적함으로써, 왜 소녀들은 전혜린의 글을 통해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에 입문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경멸과 비웃음을 이기지 못하고 ‘여류’를 벗어나려 애쓰게 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Contents
들어가며 전혜린은 ‘흑역사’인가
1 전혜린이라는 예외적 존재
2 한국을 탈출하려는 꿈
3 전근대 한국의 세계시민
4 전혜린은 ‘창작’하지 못했는가
5 수필이라는 퍼포먼스
6 신의주, 부산, 그리고 슈바빙
7 번역가 전혜린
8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
9 신여성에서 여학생까지, 소녀의 탄생
10 ‘소녀 감성’의 폄하
11 여류 작가 수난사
12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
13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
후기
참고문헌
전혜린 연보
Author
김용언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비교문학 협동과정을 졸업했다. 영화 전문지 《키노》, 《필름2.0》, 《씨네21》과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 온라인 서평 전문지 《프레시안 books》에서 10여 년간 기자 겸 편집자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 『문학소녀: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이 있으며 『지금 다시, 문예지』 『귀신 간첩 할머니: 근대에 맞서는 근대』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옮긴 책으로 『코난 도일을 읽는 밤』, 『그럼피캣』, 『죽이는 책』이 있다. 현재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비교문학 협동과정을 졸업했다. 영화 전문지 《키노》, 《필름2.0》, 《씨네21》과 장르문학 전문지 《판타스틱》, 온라인 서평 전문지 《프레시안 books》에서 10여 년간 기자 겸 편집자로 일했다. 지은 책으로 『문학소녀: 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범죄소설: 그 기원과 매혹』이 있으며 『지금 다시, 문예지』 『귀신 간첩 할머니: 근대에 맞서는 근대』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옮긴 책으로 『코난 도일을 읽는 밤』, 『그럼피캣』, 『죽이는 책』이 있다. 현재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