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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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6/04/15
Pages/Weight/Size 128*188*20mm
ISBN 9788979445435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겨레의 시인, 김소월 시선집

전 국민의 애송시로 사랑받고 있는 「진달래꽃」의 작가 김소월의 시 91편을 모았다. 여기에 김소월의 서정과 그의 시의 근대적 의미에 대해 논한 유성호 문학평론가의 해설이 덧붙여져 소월 시의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다. 한국의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서 우리나라 근대시 형성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할 수 있는 김소월의 시는 「진달래꽃」 외에도 「엄마야, 누나야」 「초혼」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시의 율격은 대개가 3음보격으로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낭송하기 좋은 운율을 갖췄으며, 민요적 가락이 우리 국민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진다. 이러한 기법이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만나 민족적 정감을 구현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다. 특히 민족시의 우수한 특성을 잘 보여준 그의 시편은 자유시가 태동하고, 서구의 문학 및 사조가 봇물을 이루던 1920년대에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김소월이 그의 시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상실의 정서다. 그는 임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과 한, 그리고 허무 의식을 한국인의 원형적인 심상에 잘 결합해 민족적 동질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그의 시는 개인적 삶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민족공동체적 서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시는 시적 함축과 절제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정성이 뛰어나 그 비유가 난해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여성적 정조와 민요적 율조로써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와 민중적 정감을 표출한 그의 시편은 앞으로도 우리 국민의 정서를 잘 드러낸 시로서 꾸준히 애송될 것이다.

Contents
1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가는 길
구름
꽃촉燭불 켜는 밤
님의 노래
먼 후일
초혼招魂
개여울의 노래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못 잊어
해가 산마루에 저물어도
눈물이 수르르 흘러납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새벽
눈 오는 저녁
깊고 깊은 언약
분粉 얼굴
옛 낯
개여울
비단안개
부부
두 사람
산 위에
동경하는 여인
설움의 덩이

2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그를 꿈꾼 밤
산유화
맘에 속의 사람
진달래꽃
님에게
반달
만나려는 심사心思
강촌江村
나의 집
찬 저녁
자주紫朱 구름
애모
잊었던 맘
춘향과 이 도령
님의 말씀
풀 따기
엄숙
가을 아침에
가을 저녁에
귀뚜라미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저녁때
봄비

3 한갓 아름다운 눈어림의 그림자뿐인 줄을

그리워
외로운 무덤
황촉黃燭불
오시는 눈
여수旅愁
접동새
희망
추회追悔
원앙침
기억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 된다고
바다
봄밤
낭인浪人의 봄
꿈꾼 그 옛날
월색月色
부모

금金잔디
님과 벗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4 당신님의 편지를 받은 그날로

기회
고적한 날
가는 봄 삼월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꿈길
엄마야 누나야
합장
바람과 봄
열락悅樂
우리 집
첫 치마
묵념
부귀공명

몹쓸 꿈
무덤

꿈으로 오는 한 사람
붉은 조수潮水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 보냐
천리만리

해설_ 유성호
Author
김소월,유성호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에 있는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장자로 출생한다. 본명은 김정식이다. 태어난 지 백일 후부터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의 본가에서 자란다. 1904년 부친 김성도가 당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를 하던 일본 목도꾼에게 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 이상 증세에 시달린다.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는데, 이 무렵 시인의 길로 가도록 영향을 준 숙모 계희영을 만났다. 1915년 평안북도 곽산의 4년제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게 되고 한시, 민요시, 서구시 등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후에 경성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23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 후 귀국했을 시점에 시인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이별과 그리움을 주제로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는 시를 썼다. 김소월은 자신의 문학적 스승인 김억의 격려를 받아 그의 지도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 5편을 소월(素月)이라는 필명으로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 「그리워」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1년 [동아일보]에 「봄밤」, 「풀 따기」 등을 발표했다. 1922년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를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1925년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하고, 같은 해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이는 시인이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으로 기록된다. 그 밖에 1923년 『깊고 깊은 언약』 『접동새』 1924년 『밭고랑 위에서』 『생과 사』 1926년 『봄』 『저녁』 『첫눈』 1934년 『제이, 엠, 에스』 『고향』 등을 발표했다.

1923년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1926년평안북도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서 이도 실패하자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기도 했다. 예민한 성격이었던 김소월은 이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류머티즘을 앓으며 친척들에게도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등 고생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만 32세의 나이로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39년 스승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가 발간된다. 1977년 [문학사상] 11월호에 미발표 소월 자필 유고시 40여 편이 발굴, 게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