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수경술의기』는 신라 스님 의적이 7세기경 찬술한 주석서이다. 본서는 신라의 정토관계 주석서 중에서 특히 독자적 해석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무량수경』의 48원과『정토론』에서 정토와 관련된 29가지 공덕을 각각 원인과 결과로 파악하여 상호 배대한 것, 『미륵문경』에서 범부의 생각이 아니라고 한 10념을, 범부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일 뿐 범부가 할 수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니라고 하여, 『무량수경』의 1념에『미륵문경』의 10념을 내재화시킨 것 등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본서는 일본에서 748 년 서사되었고, 이후 일본 정토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다. 본서가 선도善導의 구칭염불口稱念佛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로 작용하였지만 의적이 제시한 『미륵문경』의 10념이 내재화된 염불을 선도의 구칭염불과 동일시하여 양자의 계승성을 확정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의적이 선도의 사상을 그대로 계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본서는 『한불전』에 수록된 복원본 『무량술의기』에 새롭게 발굴된 미노부문고본 『무량수경술의기』에서 중복되지 않는 부분을 첨가하였다. 본서는 현재로서는 의적의 정토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의적에 대한 독립된 전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생몰연대 및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법상종 소속이었다가 의상義相(625~702)을 만나서 화엄종으로 전환했다는 기존의 관점에 따르면 그 활동 시기는 69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적이 의상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대등한 차원에서의 만남이고 학자적 입장을 교환하는 데 그쳤고, 신라를 대표하는 법상종 학자로서 지속적으로 법상종을 연구하였다는 관점에 따르면 그 활동 시기는 664년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의적의 저술로 알려진 것은 현재 총 20여 종이다. 그 목록에 의거할 때 『반야경』·『법화경』·『열반경』 및 정토계 경전과 유식계 논서가 중심이 되고 화엄계의 경향은 희박하다. 이는 의적에게 법상종 학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또 의적이 이렇게 여러 경에 두루 관심을 보인 것은 당시 신라불교에서 불교의 여러 분야를 두루 학습하던 경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의적의 저술 가운데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菩薩戒本疏』·『法華經集驗記』·『法華經論述記』의 세 권이고, 『무량수경술의기』는 여러 문헌에서 인용된 것을 묶은 복원본의 형태로 전해진다.
의적에 대한 독립된 전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생몰연대 및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법상종 소속이었다가 의상義相(625~702)을 만나서 화엄종으로 전환했다는 기존의 관점에 따르면 그 활동 시기는 69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의적이 의상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대등한 차원에서의 만남이고 학자적 입장을 교환하는 데 그쳤고, 신라를 대표하는 법상종 학자로서 지속적으로 법상종을 연구하였다는 관점에 따르면 그 활동 시기는 664년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의적의 저술로 알려진 것은 현재 총 20여 종이다. 그 목록에 의거할 때 『반야경』·『법화경』·『열반경』 및 정토계 경전과 유식계 논서가 중심이 되고 화엄계의 경향은 희박하다. 이는 의적에게 법상종 학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또 의적이 이렇게 여러 경에 두루 관심을 보인 것은 당시 신라불교에서 불교의 여러 분야를 두루 학습하던 경향성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 의적의 저술 가운데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것은 『菩薩戒本疏』·『法華經集驗記』·『法華經論述記』의 세 권이고, 『무량수경술의기』는 여러 문헌에서 인용된 것을 묶은 복원본의 형태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