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암집鏡巖集』은 조선 후기 18세기에 지리산 등지에서 활약한 경암 응윤鏡巖應允의 시문집으로 1804년(순조 4)에 경암의 제자 팔관八關이 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추성리에 있는 벽송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책판이 현재 벽송사에 남아 있고, 간행본이 동국대학교 도서관과 규장각에 전한다. 규격은 10행 21자로, 반곽半郭의 크기는 20.3×14.7cm이다. 『한국불교전서』10권에 활자화되어 실려 있다.
문집 처음에 목만중睦萬中(1727~1810)과 유숙지柳肅之의 서序가 있고, 끝에 팔관이 쓴 대사의 행장과 목만중의 영찬影贊, 이재기李在璣의 발跋이 있다. 권상에는 오언절구 19편, 오언사운五言四韻 11편, 칠언절구 29편, 칠언사운 15편, 고시 4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중에는 서書 23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하에는 서序 4편, 기記 25편, 잡저雜著 9편, 소疏 5편, 한화록문답閑話錄問答 4편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은 18세기 들어 유교적 성향이 더 짙어진 불교의 모습을 보여 준다. 대표적인 것이「오효자전」과「박열부전」이다. 「박열부전」은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과 동일 인물을 다루고 있어서 비교 연구될 만하다. 유교적 성향이 강화되면서 불교에 대한 변론도 강화되고 있는데 한유에 대한 비판을 담은 「논한자설」이 이에 해당한다. 유자들이 존중하는 인물인 한유를 비판하고 나아가 맹자까지 비판을 하는 이러한 글은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 문헌을 두루 섭렵하고 아울러 유자들과 교류를 통해 형성된 자신감의 발로로 볼 수 있겠다.
정사년 6월 일 원자 탄일의 불공소 丁巳六月日元子誕日佛供疏【玉泉寺爲祝】 ......... 252
을미년 6월 불공소 乙未六月佛供疏 ......... 254
기미년 9월 대전 탄신일 불공소 己未九月大殿誕日佛供疏 ......... 256
경신년 2월 2일 책봉 때의 불공 경찬소 庚申二月初二日?封佛供慶?疏 ......... 258
관음 불공 축觀音佛供祝 ......... 260
한화록문답閑話錄問答-4편
칠불암에서 상당하여 당승이 묵언하는 연유를~ 七佛上堂答堂僧?言來由 ......... 262
벽송사에서 정토에 답한 설 碧松社答淨土說 ......... 264
삼교의 동이를 논하다 論三敎同異 ......... 271
서운 장실이 법어를 구한 데 대하여 답하다 賽瑞雲丈室求語 ......... 273
행장行狀 / 275
경암 대사 영찬鏡巖大師影? / 278
경암집 발鏡巖集跋 / 279
주 / 282
찾아보기 / 293
Author
용담 조관,극암 사성,성재헌,이대형
속성은 여흥驪興 민씨閔氏로 영남의 거족 출신이다. 처음 법명은 관식慣拭인데 뒤에 응윤應允으로 고쳤다. 집이 경호鏡湖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호를 ‘경암’이라고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5세에 입산하여 진희震熙 장로를 만나 삭발하고, 한암寒巖 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여러 산문의 스님들을 두루 참배하고 추파 홍유秋波泓宥(1718~1774)의 문하로 들어갔다. 28세에 개당開堂하여 20여 년 대중을 교화한 후, 환암喚庵 화상을 좇아 선지禪旨를 받았다. 이에 사방의 학자가 양종兩宗의 대종사大宗師로 칭송하였다. 말년에는 여러 번 포살범망회布薩梵網會를 개설하여 사부대중이 운집하니, 모두들 당대 총림의 최고 설법으로 여겼다. 1743년(영조 19)에 태어나 1804년(순조 4) 1월 13일에 입적하였다.
속성은 여흥驪興 민씨閔氏로 영남의 거족 출신이다. 처음 법명은 관식慣拭인데 뒤에 응윤應允으로 고쳤다. 집이 경호鏡湖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호를 ‘경암’이라고 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5세에 입산하여 진희震熙 장로를 만나 삭발하고, 한암寒巖 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여러 산문의 스님들을 두루 참배하고 추파 홍유秋波泓宥(1718~1774)의 문하로 들어갔다. 28세에 개당開堂하여 20여 년 대중을 교화한 후, 환암喚庵 화상을 좇아 선지禪旨를 받았다. 이에 사방의 학자가 양종兩宗의 대종사大宗師로 칭송하였다. 말년에는 여러 번 포살범망회布薩梵網會를 개설하여 사부대중이 운집하니, 모두들 당대 총림의 최고 설법으로 여겼다. 1743년(영조 19)에 태어나 1804년(순조 4) 1월 13일에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