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1878)
조선 시대 스님이다. 속성은 김해金海 김씨金氏, 법명은 치능致能, 호는 함홍涵弘이다. 1805년 안동 송천리松川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 부모를 잃고 13세에 고운사孤雲寺 송암松庵 화상에게 출가하였는데, 송암은 세속의 숙부이기도 하였다. 은사의 배려로 유계초당酉溪草堂의 침간枕澗 김 선생에게서 유가儒家의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수학하고, 다시 삼장三藏에 뜻을 두어 1823년에 정식으로 구담九潭 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벽운碧雲·해성海城 등과 함께 당시 팔공산八公山에서 명성을 떨치던 혼허混虛 화상께 찾아가 수학하였고, 팔봉八峯 화상으로부터 “총림의 모범은 진실로 치능에게 있다.”며 인가를 받았다. 이에 다시 고운사로 돌아와 법당法幢을 건립하니,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이후 고운사와 광흥사廣興寺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1835년 겨울에 소실된 운수암雲水庵을 중건하였다. 그는 선禪·교敎·염불念佛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적절히 방편을 베풀었으며, 또한 술과 고기를 금하지 않았고, 유생들과도 긴밀히 교류하는 삶을 살았다. 1878년 10월 16일 밤에 제자들에게 “문을 열어라. 내가 길을 떠날 것이다.”라고 하고는, 앉은 채로 입적하셨다. 그의 사후 1년 뒤 1879년에 제자 야산 명원野山明遠 등이 유고를 수습하여 2권 1책의 목판으로 이 책을 간행하였다.
(1805~1878)
조선 시대 스님이다. 속성은 김해金海 김씨金氏, 법명은 치능致能, 호는 함홍涵弘이다. 1805년 안동 송천리松川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 부모를 잃고 13세에 고운사孤雲寺 송암松庵 화상에게 출가하였는데, 송암은 세속의 숙부이기도 하였다. 은사의 배려로 유계초당酉溪草堂의 침간枕澗 김 선생에게서 유가儒家의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수학하고, 다시 삼장三藏에 뜻을 두어 1823년에 정식으로 구담九潭 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벽운碧雲·해성海城 등과 함께 당시 팔공산八公山에서 명성을 떨치던 혼허混虛 화상께 찾아가 수학하였고, 팔봉八峯 화상으로부터 “총림의 모범은 진실로 치능에게 있다.”며 인가를 받았다. 이에 다시 고운사로 돌아와 법당法幢을 건립하니,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이후 고운사와 광흥사廣興寺에 주석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1835년 겨울에 소실된 운수암雲水庵을 중건하였다. 그는 선禪·교敎·염불念佛 어느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적절히 방편을 베풀었으며, 또한 술과 고기를 금하지 않았고, 유생들과도 긴밀히 교류하는 삶을 살았다. 1878년 10월 16일 밤에 제자들에게 “문을 열어라. 내가 길을 떠날 것이다.”라고 하고는, 앉은 채로 입적하셨다. 그의 사후 1년 뒤 1879년에 제자 야산 명원野山明遠 등이 유고를 수습하여 2권 1책의 목판으로 이 책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