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실학이 인간의 현실에 뿌리내린 진정한 의미의 ‘실학實學’이었는지를 재조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실학은 고원하고 교조화된 주자학적 성리학의 대안으로 제시된 학문이었다. 정통 주자학의 공허함과 경직됨에 지친 실학자들은 인간의 현실과 직접 맞닿아 있는 실용과 실질의 학문을 표방하였고, 이것은 귀납과 경험을 강조하는 근대과학적 사유와 연결되었다. 그러나 실학은 과연 우리의 경험을 포괄하는 진정한 의미의 실학實學이었는가? 이 질문은 실학이 ‘유학의 철학적 진화에 성공했는가?’를 되묻는 것이며, 동시에 철학적 도약을 위해 유학이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재점검하려는 시도이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실용주의적 유학을 표방한 조선 후기 실학의 혈맥을 관통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경세적ㆍ실용적 사유, 경험과학적 지식에 경도되어 있었으면서도, 그것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리ㆍ상제ㆍ운화기 같은 초월자를 이론의 심장부에 위치시켰다. 유형원과 이익은 초월자 ‘리’를, 정약용과 최한기는 각각 ‘상제’와 ‘운화기’를 상정하여 모든 합리성의 원천으로 삼았지만, 인간의 인지적 조건에 따르면 그것들은 객관성을 확보할 길 없는 관념의 산물일 뿐이다. 때문에 실학은 여전히 초월자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실학자들은 끝내 공소한 형이상학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도대체 실천실용에 왜 초월적 존재들이 필요한가? 결국 실학이 성취했던 근세 지향, 경세치용, 수기치인의 과감했던 실용주의적 도약은 초월적 실체의 가정으로 인해 이론적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장에서는 조선후기 실학을 ‘실학實學’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의 경험적 해명을 위해 이 연구가 의존하고 있는 탐구의 새로운 유형인 체험주의의 핵심 논제를 소개했다. 제1장과 2장에서는 조선후기 실학의 시조로 불리는 유형원과 실학의 중조로 평가되는 이익 철학의 중심부에 위치한 ‘리’를 조명했다. ‘리’를 법ㆍ제도와 동일시하는 ‘리법일치’라는 유형원의 재규정과, ‘리는 공적인 것’이라는 이익의 재해석이 보다 적극적인 현실 개입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제3장과 4장에서는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정약용의 도덕 이론이 어떤 비경험적 구도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것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정약용 철학이 초월의 존재 상제를 가정함으로써 인간의 삶 전반을 도덕적으로 제약하고 있음을 밝혔으며, 철학 구조의 경험적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 은유 분석을 시도했다. 제5장과 6장에서는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불리는 최한기 기학의 지향점과 그 속성을 규명했다. 최한기의 기학은 과학적 탐구의 신뢰를 바탕으로 경험 영역으로부터 추상 영역으로 추측해 가는 상향 방식의 시각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지만, 궁극적으로 운화기를 준적으로 한 ‘일통’에의 강한 지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객관주의적임을 밝혔다. 마지막 종장에서는 비경험적 구도가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실학이 거둔 자연주의적 성과들은 실학이 ‘초월에서 초월로’의 방향이 아니라 ‘초월에서 경험으로’ 향하고 있음을 밝혔다. 실학의 비경험적 구도는 언제든 반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유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되짚는다.
Contents
서장: 실학의 문제와 체험주의
제1장 유형원과 리의 규범화
제2장 이익: ‘사실’과 ‘가치’의 이원성
제3장 ‘리’에서 ‘상제’로
제4장 정약용 철학의 은유적 구조
제5장 상상된 보편, 운화기
제6장 최한기 기학의 은유적 해명
종장: 유학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