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태어나다. 세수 81세, 법랍은 60세. 활구참선活句參禪에 매진한 반백 년 넘는 세월에 늘 청빈한 모습으로 후학에게 수행자의 본분을 보였다. 불이不二에 대한 수행은 만 갈래 청산에 오롯이 배었고, 옷자락을 들춰 펴낸 자비심은 뭇 수행자와 불자들을 고루 안았다. 화두話頭의 불꽃이 숯불처럼 뜨거웠던 큰스님의 가슴속엔 그지없이 평온한 반야경般若經이 환히 빛났다.
적명 스님 행장
희양산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은 1939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적 고뇌로 출가할 것을 결심하여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하셨다. “그러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묘소를 꾸며 드리고 가겠습니다.” 하니, 어머님이 묵묵히 허락하셨다.
선지식을 찾아 뭍으로 나와 나주 다보사 우화雨華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1959년 해인사 자운 율사에게 사미계를, 1966년 해인사 자운 율사에 의해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사형인 진상眞常 스님의 권유로 관음주력에 매진하던 중 어느 날, 삼라만상 극락지옥이 눈앞에 보이듯 뚜렷한 것을 체험하고, 당시 선지식인 범어사 동산 스님, 통도사 경봉 스님 등을 참알하였으나 그분들의 법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환희심에 들떠 자부에 매몰해 있었기 때문이다.
26세에 토굴에서 우연히 보조국사의 『절요』를 읽다가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구절을 보고, 마음에 크게 느낀 바 있어 무자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하였다. 28세에 해인사로 가서, 1967년 해인총림이 개설되고 성철 스님이 방장에 추대되어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가행정진한 이래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 선지식인 전강 스님, 경봉 스님, 구산 스님, 성철 스님, 서옹 스님, 향곡 스님 등 문하에서 법을 묻고 정진하였고, 『능엄경』 변마장의 내용이 낱낱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화두선에 더욱 매진하였다. 해인총림 선원장, 영축총림 선원장, 고불총림 선원장, 수도암 선원장, 은해사 기기암 선원장 등을 역임하고, 전국수좌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9년 정월, 구산선문 중 하나이자 봉암사 결사의 전설적 청정도량인 봉암사에 주석, 대중의 추대로 수좌 소임을 맡은 후 입적하는 날까지 대중과 함께 정진, 운력, 공양하는 등 후학에게 수행자의 본분을 보였다. 간화선 선풍을 진작하고자 외호 대중의 도움과 문경시와의 협의 아래 국제선센터 건립을 발원하여 2015년 선원수좌회와 공동으로 문경세계명상마을 건립을 본격 추진하고, 평생 청빈한 삶으로 돌보는 이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수행자를 위하여 수좌복지회를 만들 것을 제의, 성사시켰으며, 봉암사에 원로 수좌를 모시기 위해 원로선원을 건립하였다.
스님은 오로지 본분사에만 매진하고 선방 밖의 일에는 거의 돌아보지 않았으나, 간혹 법을 묻는 이가 찾아오면 다양한 비유와 진솔한 설법으로 대중을 감통케 하되, 중도가 불교의 근본 교의임을 설파하며 화두선이야말로 중도를 바로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지름길임을 강조하고, 설사 화두 타파를 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을 활기차게 영위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2018년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하고, 2019년 12월 24일(동짓달 스무여드레)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 81세, 법랍은 60세였다.(글 _ 연관 스님)
제주에서 태어나다. 세수 81세, 법랍은 60세. 활구참선活句參禪에 매진한 반백 년 넘는 세월에 늘 청빈한 모습으로 후학에게 수행자의 본분을 보였다. 불이不二에 대한 수행은 만 갈래 청산에 오롯이 배었고, 옷자락을 들춰 펴낸 자비심은 뭇 수행자와 불자들을 고루 안았다. 화두話頭의 불꽃이 숯불처럼 뜨거웠던 큰스님의 가슴속엔 그지없이 평온한 반야경般若經이 환히 빛났다.
적명 스님 행장
희양산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은 1939년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철학적 고뇌로 출가할 것을 결심하여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하셨다. “그러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묘소를 꾸며 드리고 가겠습니다.” 하니, 어머님이 묵묵히 허락하셨다.
선지식을 찾아 뭍으로 나와 나주 다보사 우화雨華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고, 1959년 해인사 자운 율사에게 사미계를, 1966년 해인사 자운 율사에 의해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사형인 진상眞常 스님의 권유로 관음주력에 매진하던 중 어느 날, 삼라만상 극락지옥이 눈앞에 보이듯 뚜렷한 것을 체험하고, 당시 선지식인 범어사 동산 스님, 통도사 경봉 스님 등을 참알하였으나 그분들의 법어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환희심에 들떠 자부에 매몰해 있었기 때문이다.
26세에 토굴에서 우연히 보조국사의 『절요』를 읽다가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활구참선을 해야 한다.”는 구절을 보고, 마음에 크게 느낀 바 있어 무자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하였다. 28세에 해인사로 가서, 1967년 해인총림이 개설되고 성철 스님이 방장에 추대되어 선풍이 일기 시작하자, 가행정진한 이래 평생 선방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 선지식인 전강 스님, 경봉 스님, 구산 스님, 성철 스님, 서옹 스님, 향곡 스님 등 문하에서 법을 묻고 정진하였고, 『능엄경』 변마장의 내용이 낱낱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화두선에 더욱 매진하였다. 해인총림 선원장, 영축총림 선원장, 고불총림 선원장, 수도암 선원장, 은해사 기기암 선원장 등을 역임하고, 전국수좌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9년 정월, 구산선문 중 하나이자 봉암사 결사의 전설적 청정도량인 봉암사에 주석, 대중의 추대로 수좌 소임을 맡은 후 입적하는 날까지 대중과 함께 정진, 운력, 공양하는 등 후학에게 수행자의 본분을 보였다. 간화선 선풍을 진작하고자 외호 대중의 도움과 문경시와의 협의 아래 국제선센터 건립을 발원하여 2015년 선원수좌회와 공동으로 문경세계명상마을 건립을 본격 추진하고, 평생 청빈한 삶으로 돌보는 이 없이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수행자를 위하여 수좌복지회를 만들 것을 제의, 성사시켰으며, 봉암사에 원로 수좌를 모시기 위해 원로선원을 건립하였다.
스님은 오로지 본분사에만 매진하고 선방 밖의 일에는 거의 돌아보지 않았으나, 간혹 법을 묻는 이가 찾아오면 다양한 비유와 진솔한 설법으로 대중을 감통케 하되, 중도가 불교의 근본 교의임을 설파하며 화두선이야말로 중도를 바로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는 가장 지름길임을 강조하고, 설사 화두 타파를 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생활을 활기차게 영위할 수 있는 공능이 있다고 강조하였다. 2018년 종단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하고, 2019년 12월 24일(동짓달 스무여드레)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 81세, 법랍은 60세였다.(글 _ 연관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