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가 살던 전국 시대는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으로 온 세상이 전쟁에 휩싸여 있었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인의가 통하지 않는, 도덕이 땅에 떨어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혼탁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보다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보고 제자백가의 사상들을 깊이 연구하고 자신이 속한 유가를 비롯해 모든 사상을 비판하여 일부 장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특히 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법가 사상이었다. 법가와 같은 부국강병의 논리가 현실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진나라를 통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순자는 도덕이 땅에 떨어진 시대에 인간을 구원하고 도덕에 입각한 왕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엄격한 법과 예와 같은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므로 순자가 강조한 것은 인간 또한 인간 사회가 지닌 부도덕성이나 악함이 아니라 그에 대한 개선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 《순자》를 통해 우리는 이상보다는 현실에서 인간 문제를 해결하려 한 냉철한 이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순자의 이야기는 시공을 초월해서 오늘날에도 그 가치가 높다고 할 것이다.
Contents
청소년 철학창고를 펴내며
들어가는 말
춘추 전국 시대 국가들
고대 중국의 성인(聖人) 계보
1 학문을 권장하다[勸學]
2 몸을 닦는 방법[修身]
3 구차해서는 안 된다[不苟]
4 영예와 치욕[榮辱]
5 관상을 보지 않는다[非相]
6 열두 명의 학설을 비판하다[非十二子]
7 공자[仲尼]
8 유학의 효능[儒效]
9 왕의 제도[王制]
10 부유한 나라[富國]
11 왕도와 패도[王覇]
12 군주의 도리[君道]
13 신하의 도리[臣道]
14 선비를 끌어들이는 방법[致士]
15 병법에 대한 논의[議兵]
16 강한 나라[彊國]
17 천도에 대해 논함[天論]
18 올바른 이론[正論]
19 예에 대한 논의[禮論]
20 음악에 대한 논의[樂論]
21 닫힌 마음을 열다[解蔽]
22 올바른 명칭[正名]
23 인간의 악한 본성[性惡]
24 군자에 대하여[君子]
25 성상(成相)
26 부(賦)
27 여러 가지 견해[大略]
28 유좌의 교훈[宥坐]
29 자식의 도리[子道]
30 본받을 행동[法行]
31 공자와 애공의 문답[哀公]
32 요임금과 순임금의 대화[堯問]
순자, 유가의 현실주의자
Author
순자,최영갑
순자는 공자의 유학(儒學)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맹자(孟子)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학문에 매달려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대성했고, 중국 통일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며 현실 정치에 접목할 수 있는 유학의 새로운 틀을 구성해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통일 제국의 이념적 토대가 된 것은 오히려 그의 제자로서 법가를 기치로 내건 한비와 이사의 학문으로 알려져있다.
순자의 성은 순(荀)이고, 이름은 황이었다. 그는 조(趙)나라(지금의 山西省 安澤縣)에서 태어나 일찍이 공부를 시작하여 어려서 수재로 이름이 났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순경이라고도 부르고 한나라 때에는 선제의 이름을 휘(諱)하여 손경이라 부르기도 했다. 장년이 되자 많은 학자들이 모여 있는 제나라 직하(稷下, 지금의 山東省 臨淄縣 북쪽)로 가서 학술계의 우두머리 격이 되어 존경받는 좨주(祭酒) 벼슬을 하고 대부(大夫)가 되었다. 후에 모함으로 제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는데 재상인 춘신군이 그를 난릉(蘭陵, 지금의 山東省 蒼山縣)의 수령(守令)으로 임명하였다.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저술에 전념하다가 운명을 달리하였으며 난릉에 그의 영혼이 묻혔다.
순자의 학문적 성취가 진정으로 구현된 것은 그의 사후 수십 년이 흐른 뒤 한나라에 와서 유학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뒤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격동의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의 모든 학설을 섭렵하는 치열한 학문적 노력으로 초기 유가 사상의 학문적 체계를『순자』를 통해 집대성했다. 저서로는 『순자』 20권 32편 이외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손경부(孫卿賦)』 10편 등이 있다.
순자는 공자의 유학(儒學)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맹자(孟子)와 쌍벽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학문에 매달려 제자백가의 사상을 집대성했고, 중국 통일의 기운을 몸으로 느끼며 현실 정치에 접목할 수 있는 유학의 새로운 틀을 구성해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통일 제국의 이념적 토대가 된 것은 오히려 그의 제자로서 법가를 기치로 내건 한비와 이사의 학문으로 알려져있다.
순자의 성은 순(荀)이고, 이름은 황이었다. 그는 조(趙)나라(지금의 山西省 安澤縣)에서 태어나 일찍이 공부를 시작하여 어려서 수재로 이름이 났었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순경이라고도 부르고 한나라 때에는 선제의 이름을 휘(諱)하여 손경이라 부르기도 했다. 장년이 되자 많은 학자들이 모여 있는 제나라 직하(稷下, 지금의 山東省 臨淄縣 북쪽)로 가서 학술계의 우두머리 격이 되어 존경받는 좨주(祭酒) 벼슬을 하고 대부(大夫)가 되었다. 후에 모함으로 제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는데 재상인 춘신군이 그를 난릉(蘭陵, 지금의 山東省 蒼山縣)의 수령(守令)으로 임명하였다. 춘신군이 암살당하자 벼슬 자리에서 물러나 저술에 전념하다가 운명을 달리하였으며 난릉에 그의 영혼이 묻혔다.
순자의 학문적 성취가 진정으로 구현된 것은 그의 사후 수십 년이 흐른 뒤 한나라에 와서 유학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뒤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격동의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의 모든 학설을 섭렵하는 치열한 학문적 노력으로 초기 유가 사상의 학문적 체계를『순자』를 통해 집대성했다. 저서로는 『순자』 20권 32편 이외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손경부(孫卿賦)』 10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