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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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1/08/29
Pages/Weight/Size 130*188*20mm
ISBN 9788974471774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치열한 시대정신으로 뜨겁게 살다간 마돈나의 시인 이상화
[백조]동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단에 나온 이상화. 초기에는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쓰다가 1924년쯤을 기점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이 민족현실을 담은 시를 노래했던 그는 철저하고 다분하게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저항시의 참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그러나 한편으로 당시 풍미하던 프랑스의 세기말 사상이나, 러시아적 우울이 그를 지배했고 나라 잃은 민족으로서의 헤어날 길 없는 슬픔이 날마다 그를 술독에 빠져 취하게 했다. 그는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나는 술 취한 집을 세우려 한다’고 노래했으랴. 용광로처럼 뜨거운 삶을 살았던 이상화. 그는 나라 잃은 국민의 비통과 분노를 문학에 담은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자 영원한 민족주의 시인이었다.
Contents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그날이 그립다
서러운 해조
이별을 하느니
무제
방문 거절
극단
빈촌의 밤
비음
바다의 노래
어머니의 웃음
가장 비통한 기욕
조소
지반정경
허무교도의 찬송가
독백
가을의 풍경
이중의 사망
말세의 희탄
단조
초혼
비 갠 아침
원시적 읍울
본능의 노래
대구행진곡
이 해를 보내는 노래
몽환병
겨울 마음
조선병
엿장사
거러지
선구자의 노래
구루마꾼
마음의 꽃
폭풍우를 기다리는 마음
오늘의 노래
반짓불
농촌의 집
달아
나는 해를 먹다
역천
통곡
파란 비
비를 다고
시인에게
무제
곡자사
눈이 오시네
저무는 놀 안에서
지구 흑점의 노래
달밤 - 도회
병적 계절
청년
예지
청량세계
쓰러져가는 미술관
동경애서
금강송가

이상화 평전
Author
이상화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거사 모임에 참석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 냉동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白潮)] 동인으로 문단에 참여하기 시작, 창간호에 시「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 1923년 3월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하였으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여 귀국했다. 가회동 이른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 1925년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26년,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지만 이 시의 게재로 [개벽]지는 판매 금치 처분을 당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이 시기를 고비로 식민치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후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다가,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지 5년째 되는 1948년에, 해방 후 최초의 시비가 달성공원에 건립되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바로 꿰뚫어보는 가운데 치열한 시대 정신과 따뜻한 휴머니즘 정신을 아름다운 예술 혼으로 승화시킨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

1901년 4월 5일(음력)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하여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하고, 그 해 7월 서문로 집을 나서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 거사 모임에 참석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 냉동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하였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백조(白潮)] 동인으로 문단에 참여하기 시작, 창간호에 시「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 1923년 3월 아테네 프랑세를 수료하였으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분노하여 귀국했다. 가회동 이른바 취운정(翠雲亭)에 머물면서 시 「나의 침실로」를 [백조] 3호에 발표, 1925년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다음해인 1926년, [개벽] 70호에 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지만 이 시의 게재로 [개벽]지는 판매 금치 처분을 당했다. 작품활동 초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이 시기를 고비로 식민치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 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후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창작의 끈을 놓지 않다가,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계산동 2가 84번지 고택에서 부인과 세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운명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지 5년째 되는 1948년에, 해방 후 최초의 시비가 달성공원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