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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한용운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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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897012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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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4/05/15
Pages/Weight/Size 147*202*40mm
ISBN 9788970125800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만해 한용운의 시와 시조, 한시를 한데 모아 엮은
한용운 시전집 최신 결정판

만해 한용운의 저작 가운데 시와 시조 그리고 한시를 모두 한데 모아 엮은 한용운 시전집. 한용운이 일본 유학 시절 발표했던 한시들을 발굴해내는 등 한용운 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권영민 교수가 그간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노작이다,

한용운의 시는 시집 『님의 침묵』에 수록된 작품이 중심을 이루지만 시집 발간 이후 신문, 잡지에 발표한 작품이 상당수에 이른다. 한용운은 일찍부터 한시를 썼는데, 일본 체류 중의 한시와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쓴 옥중시가 있다. 그리고 한용운이 발표한 많은 시조 작품도 있다.

“님에 대한 갈망은 시인 한용운의 사상과 행동과 예술을 사랑이라는 결정체로 만들어놓고 있다. 고통과 시련의 시대에 대항하여 떳떳하게 자기를 세우고 자기 의지를 말하고 있는 한용운의 시에는 언제나 사랑의 참뜻이 담겨 있다. 증오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비판하면서도, 한용운은 사랑의 의미를 강조한다. 강압적인 침략에 의해 모든 것을 약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용운은 평등을 내세우고 분노를 감정적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한용운의 시는 비탄과 정한의 노래가 아니다. 한용운은 님이 떠나버린 슬픔을 말하면서도,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님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신념을 강조하고 있다. 비극의 현실 속에 빠져 있는 개인의 정서적 파탄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존재의 본질과 새로운 삶의 전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용운의 시는 의지적이며 강렬한 어조가 돋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한용운 자신의 혁명적 기질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지만, 역사의식의 투철성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삶에 대한 정직성을 지키고, 악에 항거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투쟁한 행동적 실천가였음을 생각한다면, 이 같은 의지를 시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가장 서정적인 어조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권영민, 부록 2 「만해 한용운을 다시 읽다」에서

이 책에서 모든 시 작품은 현대어 표기로 고친 것을 앞에 싣고 그 원문을 발표 당시의 표기대로 수록했으며, 오늘날의 독자에게 까다로운 옛말이나 고유어는 주석을 붙여 설명했다. 한시의 경우는 번역문을 앞에 싣고 한문 원전을 뒤에 수록했다. 특히 모든 작품의 한자에 독음을 표기하여 독자의 이해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이 책의 말미에는 한용운의 시 세계를 알기 쉽게 설명한 작품 해설을 부록으로 실었으며 한용운의 삶과 사상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한용운의 생애를 연보 형식으로 정리했다.
Contents
책머리에 / 한용운 시전집을 다시 엮으며(권영민)

제1부 『님의 침묵』

군말 / 님의 침묵 / 이별은 미(美)의 창조 / 알 수 없어요 / 나는 잊고자 / 가지 마셔요 / 고적한 밤 / 나의 길 / 꿈 깨고서 / 예술가 / 이별 / 길이 막혀 / 자유정조(自由貞操) / 하나가 되어 주셔요 / 나룻배와 행인 / 차라리 / 나의 노래 / 당신이 아니더면 / 잠 없는 꿈 / 생명 / 사랑의 측량 / 진주 / 슬픔의 삼매(三昧) / 의심하지 마셔요 / 당신은 / 행복 / 착인(錯認) / 밤은 고요하고 / 비밀 / 사랑의 존재 / 꿈과 근심 / 포도주 / 비방 / [?] / 님의 손길 / 해당화 / 당신을 보았습니다 / 비 / 복종 / 참아 주셔요 / 어느 것이 참이냐 / 정천한해(情天恨海) / 첫 「키스」 / 선사(禪師)의 설법(說法) / 그를 보내며 / 금강산 / 님의 얼굴 / 심은 버들 / 낙원은 가시덤불에서 / 참말인가요 / 꽃이 먼저 알아 / 찬송 / 논개(論介)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 후회 / 사랑하는 까닭 / 당신의 편지 / 거짓 이별 / 꿈이라면 / 달을 보며 / 인과율 / 잠꼬대 / 계월향(桂月香)에게 / 만족 / 반비례 / 눈물 / 어디라도 / 떠날 때의 님의 얼굴 / 최초의 님 / 두견새 / 나의 꿈 / 우는 때 / 타골의 시(GARDENISTO)를 읽고 / 수(繡)의 비밀 / 사랑의 불 / 「사랑」을 사랑하여요 / 버리지 아니하면 / 당신 가신 때 / 요술 / 당신의 마음 / 여름밤이 길어요 / 명상 / 칠석 / 생의 예술 / 꽃싸움 / 거문고 탈 때 / 오셔요 / 쾌락 / 고대(苦待) / 사랑의 끝판 / 독자에게

제2부 심우장 산시 외

1. 심우장 산시(尋牛莊散詩)
산거(山居) / 산골 물 / 모순 / 천일(淺日) / 쥐 / 일출 / 해촌(海村)의 석양 / 강 배 / 낙화 / 일경초(一莖草) / 파리 / 모기 / 반월(半月)과 소녀

2. 『님의 침묵』 전후의 시
심(心) / 일경초(一莖草)의 생명 / 가갸날 / 바다 / 모래를 파서 / 성탄 / 비바람 / 반달과 소녀 / 산촌의 여름 저녁 / 세모(歲暮) / 지는 해 / 산 너머 언니 / 농(籠)의 소조(小鳥) / 달님 / 달님 / 달님

3. 시조
무궁화를 심으과저 / 성불(成佛)과 왕생(往生) / 갈매기 / 명사십리(明沙十里) / 가신 님 심은 나무 / 환가(還家) / 무제(無題) / 선우(禪友) / 우리 님 / 실제(失題) / 심우장(尋牛莊) / 어옹(漁翁) / 추야몽(秋夜夢) / 한강에서 / 조춘(早春) / 사랑 / 춘화(春畵) / 선경(禪境) / 추야단(秋夜短) / 춘조(春朝) / 코스모스 / 성공(成功) / 추화(秋花) / 남아(男兒) / 직업부인(職業婦人) / 표아(漂娥) / 무제(12편)

제3부 한시

1. 산가(山家)의 시
영호(映湖) 화상에게 보내 면식이 없는 뜻을 나타내다 / 완호(玩豪) 학사를 이별하며 / 만화(萬化) 화상을 대신하여 임향장(林鄕長)의 죽음을 조상하다 / 선방 후원에 올라 / 가을 밤비 / 피난 도중 비로 머물면서 느낀 바가 있기에 / 석왕사에서 영호·유운 화상을 만나 짓다 / 영호 화상과 함께 유운 화상을 방문하였다가 밤에 함께 돌아오다 / 산가의 새벽 / 본 대로 읊다 / 한적(閑寂) / 영호 화상의 시에 차운하다 / 고향 생각 / 영호 화상의 시에 차운하다 / 『염락풍아』를 읽다가 주자가 소동파의 매화 시의 운을 써서 매화를 읊은 시가 있기에 / 또 옛사람이 매화를 두고 오언 고시를 쓴 적이 없기에 내가 호기심이 나서 시험삼아 읊다 / 새벽 / 영호 화상의 향적(香積) 시에 차운하다 / 스스로 번민하다 / 스스로 즐거워하다 / 달을 완상하다 / 세모(歲暮)에 찬 비 내리기에 느낀 바가 있어 / 한가로이 노닐며 / 달을 보다 / 달이 돋으려 하기에 / 달이 막 떴기에 / 달이 막 한가운데 떴기에 / 달이 지려 하기에 / 본 대로 읊다 / 고향을 그리워함 / 시벽(詩癖)에 대해 스스로 웃다 / 청한(淸寒) / 바람과 눈에 대비하여 안팎의 문을 닫고 창틈은 흙으로 바르고 장난삼아 짓다 / 홀로 앉아서 / 동지(冬至) / 눈 내린 새벽 / 고의(古意) / 한가로이 읊다 / 유운 화상이 병들어 누워 심히 안쓰럽고 또 향수가 더해져서 짓다 / 날은 추운데 옷이 오지 않아 장난삼아 짓다 / 본 대로 읊다 / 눈 온 뒤 그냥 읊다 / 병든 시름 / 한가로움을 읊다 / 병들어 읊다 / 홀로 읊다 / 여행 중의 회포 / 새벽 경치 / 홀로 지내는 밤 / 본 대로 읊다 / 회포를 읊다 / 높은 곳에 오르다 / 출정 나간 군인 아내의 원망 / 산속의 대낮 / 먼 그리움 / 느끼는 대로 읊다 / 홀로 노닐다 / 내원암(內院庵)에 오래된 모란 가지가 눈을 맞아 마치 꽃이 핀 듯해서 읊다 / 영호·유운 화상과 함께 밤에 시를 짓다 / 백화암(白華庵)을 찾다 / 한강 / 영호, 금봉 두 사백께 드리다 / 경성에서 영호·금봉 두 사백을 만나 함께 읊다 / 번민을 풀다 / 양진암(養眞庵)에서 봄을 보내다 / 양진암 / 청정한 노래 / 운수(雲水) /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鶴鳴) 선사에게 드리다 / 선암사(仙巖寺)에서 아프고 나서 짓다 / 금봉 사백과 밤에 시를 읊조리다 / 향로암(香爐庵)에서 밤에 읊조리다 / 선암사에 머물면서 매천(梅泉)의 시에 차운하다 / 향로암에서 느낀 바대로 짓다 / 영산포(榮山浦)에서 배 타고 가면서 / 떨어진 매화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 범어사(梵魚寺)에서 비 갠 뒤 감회를 적다 / 봄날 규방의 원망 / 막 날씨가 갬 / 어부의 피리 소리 / 파릉(巴陵) 어부의 뱃노래 / 안중근 의사 / 매천(梅泉) 황현(黃玹) / 화엄사(華嚴寺)에서 산보하며 / 구곡령(九曲嶺)을 지나며 / 산가의 일흥(逸興) / 약사암(藥師庵) 가는 길 / 구암사(龜巖寺)의 초가을 / 감회를 읊다 / 구암폭포 / 구암사에서 송청암(宋淸巖) 형제와 같이 읊다 / 쌍계루(雙溪樓) / 남형우(南亨祐)에게 주다 / 송청암에게 주다 / 경성에서 오세암(五歲庵)으로 돌아와 박한영(朴漢永)에게 주다 / 중양절(重陽節)에 / 정사년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 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을 떨구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갑자기 풀렸다. 그래서 시 한 수를 짓다 / 오세암 / 눈 오는 밤 그림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 무제 8수 / 무제 2수 / 신문 폐간 / 회갑날의 즉흥 / 삼가 방응모(方應謨) 선생의 생신을 축하드리다

2. 일본에서 쓴 시
마관(馬關)으로 가는 배 위에서 / 궁도(宮島)로 가는 배 안에서 / 고향을 생각하다 / 천전(淺田) 교수에게 화답하다 / 갠 날을 읊다 / 빗속에 홀로 읊다 / 동경(東京) 여관에서 매미 소리를 듣다 / 나비 / 맑은 새벽 / 봄 꿈 / 조동종(曹洞宗)대학교 별원(別院)에서 / 고의(古意) / 증상사(增上寺)에서 / 밤에 빗소리 들으며 / 지광(智光) 어른에게 바치다 / 일광(日光) 가는 길에서 / 일광 남호(南湖) / 독창(獨窓)에 비바람 치기에 / 들길을 가며 / 가을밤 빗소리를 듣고 느낀 바가 있어서 / 가을 새벽

3. 옥중시(獄中詩)
어느 날 이웃 방과 말을 나누다가 간수에게 들켜 두 손을 2분간 가볍게 묶이었다. 그래서 느낀 대로 읊다 / 옥중에서의 감회 / 학생에게 주다 / 가을비 / 가을의 감회 /눈 내리는 밤 / 벚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 기러기를 읊다 / 병감(病監)의 뒤뜰 / 고우(古友)에게 선화(禪話)를 보내다 / 다듬이 소리 / 등불 그림자를 읊다 / 이별할 때 주다

부록 1. 한용운 시의 새로운 이해
부록 2. 만해 한용운을 다시 읽다―한용운의 문학적 글쓰기
부록 3. 한용운 연보
Author
한용운,권영민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