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의 첫시집. 『종자의 자격』은 시인이라는 문패도 없이 시인보다 더 뜨겁게 시를 써왔던 그를 지켜본 지인들의 추동으로 세상에 나왔다. “시적 언어, 시적 함축, 시적 은유, 나는 그런 글을 써 본적도 없고 쓸 능력도 없다. 꽃을 찍고 그 꽃을 글로 써보고 골목을 찍고 다시 더듬고 얼굴을 찍고 대화를 나눈 것뿐이다. 내 팔자에 무슨 시집이야.” 하는 그를 어르고 달래는 사이 그의 시는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잎을 틔웠다. 이 놀라운 성장을 보라.
김성장 시인은 “정진호의 시는 시로 기획되었다기보다 시 이전의 일상어이다. 자신이 하는 일과 언어 사이의 거리를 한 치의 간극도 없이 밀착시켰기 때문에 언어는 수사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도 없이 시가 되었다.” 말하고,
해설을 쓴 오철수 시인은 “삶의 생기를 담는 생생하고 담박한 서정”에 주목하며 “발톱을 파고들고/ 생살을 뚫고 들어오는/ 무게만큼 편자를 박는” 것. 삶의 무게를 적극적으로 살아버리고, 살아버림으로서 “사랑 하나로 널 가뿐히 업고 가리라”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 “허참!/ 속 다 내주고도/ 씨눈 하나 남았다고/ 싹을” 틔우는 자기 생명의 숨결을 다하는 삶, 그리고 생명적 숨결을 따르는 시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정진호 시인은 32년간의 교직에서 퇴직 후 텃밭농사를 지으며 평생 하고 싶었던 서예, 서각, 사진, 클래식기타 등을 안고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비로소 늙은 자유의 초로에/ 글을 쓰고 돈도 버리고/ 새벽이나 대낮이나 시간 어름 없는/ 텃밭에서, 상추 오이 고추/ 물방울 대롱거리는 것들과/ 행복한 일기를 쓴다/ 숙제검사 없는 일기를 쓴다”고 말한다. 그렇게 일기를 쓰듯 순간순간 스치는 감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가 된 그가 시와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나도 시 써볼까, 하는 자극쯤은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낸 시집.
하지만 그의 시편을 따라가다 보면, 그 모든 것이 조금은 엄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독하고 지극한 삶의 뒤란에 다가간 섬세한 서정에 뭉클하기도 하고 행간 사이 숨어 있는 위트와 다정함에 웃기도 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사람-정진호, 정진호-시에 빠지게 된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시인이다.
Contents
시인의 말
제1부
잔치국수 같은 시/ 두유/ 미역국/ 달래꽃 처음 본 날/ 귀리를 볶다가/ 완두콩/ 종자의 자격/ 아비라고/ 살려달라고?/ 해볼까, 무심히/ 꼬막무덤/ 스위치/ 날을 세우는 일/ 울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