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도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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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6/12/26
Pages/Weight/Size 150*210*18mm
ISBN 9788965703938
Categories 에세이
Description
유쾌하고 열정적인 사람,
그러나 내면에 상처 입은 짐승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

절망의 끝에서 위안과 희망을 노래하는
가슴 뜨거운 뮤지션, 김장훈의 속 깊은 이야기


가수 김장훈은 ‘문제적’ 인간이다. 철학과 소신이 지나치게 뚜렷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고 가끔 욕을 먹기도 한다. 그럼에도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건 “내 인생에 쪽팔리기 싫어서 오늘만 산다”는 사람이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없이 월셋집을 전전하면서도 왜 그는 몇십 년째 나눔 활동을 주저하지 않는 걸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회의 약자들에게 손을 내밀게 하는 걸까? 그가 그토록 뜨겁게 세상에 전하려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이 책은 꾸미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조금 부끄럽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말하는 김장훈의 속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그늘에서 소외되며 방황했던 성장기, 단지 살기 위해서 절규하다가 운명처럼 가수의 길로 들어서게 된 사연, 궁극의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음악관과 공연 철학, 그리고 나눔과 참여에 대한 단상 등을 진솔하게 펼쳐놓는다. 두려움 없이 올곧게 살아가려 애쓰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을 담아 전한다.
Contents
Prologue 나는 나를 도발한다

1장 고독한 어린이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았을 뿐 | 자전거, 그 허무의 바퀴 | 음성(音聲) 서클 ‘완쓰리’ | 김장훈과 한국사람 | 여의도, 1991 | +절망의 끝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 잠수 | 레터 투 김현식 | +약속 | 가족이란 이름으로 [나와 같다면] | +굿바이 투 로맨스

2장 무사의 길
행복한 키다리 | +가수의 날? 관객의 날! | 관객은 나의 군주 | 이벤트, 그 궁극의 휴머니즘을 위하여 | 공연장의 모순 | 약속 Ⅱ | +소녀의 편지 | 세상에서 가장 큰 공연 | 공황장애, 허무의 끝에서 하루를 생애처럼 | +귀여운 공황장애 | 세상에 없는 세상

3장 행복은 ‘빠다’ 식빵
돈에 대하여 | 행복은 ‘빠다’ 식빵 | 불행한 일보다 불행한 일 | 혼자만 잘 먹으면 무슨 맛일까 | +우분투(Ubuntu)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부 |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게 하라 | ‘행그리(Hangry)’ 아이들 | +나에게 어린이란!

4장 라삐끼, 쑝디, 싸빗 그리고 친구
김장훈숲 | 녹색장성프로젝트 | +나눔을 실천할 때 지키는 철학 | 너와 나, 우리는 ‘싸빗’ | + Can you speak English? | 남수단 에필로그

5장 독도를 수읽기 하다
고독한 섬 | +No way | 361, 그 우주

6장 곡비, 대신 울어주는 남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력함 | 광화문, 가슴으로 가는 길 | 가장 허망하고 아픈 하루 | +정치화와 정치색

7장 리얼리스트
삶의 고비엔 늘 누군가가 있다 | +타인에게서 나를 읽다 | 친구 | 동길이 이야기 | 마더(Mother) | +이미지 관리 | 포기하느니 분노하라 | 꿈 | +광대 | 가족

Eplogue 쓰레기 더미에서도 혁명은 피어난다
Author
김장훈
한때 김장훈은 정말 노래만 불렀다. 그의 노래제목처럼. 적어도 그가 말하는 이른바 ‘소파 생활’을 할 때는 그랬다. 때는 대략 1994년에서 1997년 사이다. 경원대학교 영문과실 소파에 앉아 밤이건 낮이건 언제나 노래만 불렀다. 오죽했으면 옆 과실에서 자던 학우들이 새벽녘 느닷없이 포효하는 그의 거친 노랫소리에 놀라 깼다는 에피소드가 들릴까.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고단했던 소파 생활은 하지 않는다. 발라드 ‘나와 같다면’의 히트로 그는 지루했던 언더 아닌 언더 생활을 청산하고 주류 연예계에 입성했다. 이후 그가 보여준 활약은 참 눈부셨다. 처음 출발은 < 이소라의 프로포즈 >. 토크와 라이브가 결합된 이 프로그램은 김장훈의 진면목을 발휘하기에 아주 적합한 무대였다. 이승환, 박상민과 더불어 가요계 만담꾼 빅3라 할 정도로 말재주가 뛰어난 그는 이소라의 넋이 나갈 정도로 사람들을 웃겼다(어쩌면 ‘웃기다’는 것이 요즘 팬들에겐 처음 떠오르는 그의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이러한 김장훈의 ‘놀라운’ 재능이 소문나자 방송국들은 앞다퉈 그를 섭외 했다. 그의 노래 ‘나와 같다면’이 큰사랑을 받았지만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노래보단 그의 ‘입심’을 더 원했다. 김장훈은 그 요구를 가능한 한 모두 수용했다. 그래서 < 김혜수의 플러스 유 > 같은 토크쇼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 이소라의 프로포즈 >에서는 ‘최대 출연자’라는 영예도 얻었다. 이제 그는 노래만 부르지는 않는다. 종종 ‘개인기’도 척척 해내며, 팬들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망가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 그를 엔터테이너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지만 예전의 그를 알던 일부 사람들은 그의 요즘모습을 보고 변절이라 욕한다. 도대체 그가 예전엔 무엇을 했다고 그런 비난을 하는 건지? 김장훈을 개그맨 정도로 여기거나 최근에 그를 알게된 사람들은 다들 그를 발라드 가수로 여기고 있다. 그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 그를 대중적으로 알린 ‘나와 같다면’이나 히트곡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Good-bye day’, ‘혼잣말’ 같은 노래들은 모두 발라드 곡들이다. 이렇듯 발라드 곡들을 부르는데 발라드 가수가 아니란 말인가? 애매하긴 하지만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이다. 김장훈은 1991년 처음 데뷔했다. 그는 로커였다. 그것도 목이 터져라 내지르는 창법을 구사하는 로커. 요즘도 간간이 그런 창법을 들려주지만 당시엔 요즘처럼 일정 음역 내에서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음역대를 소화하며 내지르는 것이었다. 록 보컬의 대가들인 전인권, 김현식을 존경했다니 알만 하지 않은가. 데뷔 당시는 물론이고 한참 후까지 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몇 번 관심을 끈 적이 있긴 하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유작앨범이 불티나게 팔리던 1991년쯤이었다. 당시 김장훈은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호형호제하는 사이였지만 사촌관계는 아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미완성이었던 김현식의 7집에서 ‘다시 처음이라오’와 ‘사랑의 불씨’를 불러 화제를 모았다. 그는 김홍준 감독의 1994년 영화 < 장미빛 인생 >에서 조동익이 작곡한 주제곡 ‘아침을 맞으러’를 불러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아무튼 2집을 거쳐 3집 < 노래만 불렀지 >에 이르기까지 김장훈은 지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노래만 부르던 시기였다. 소파 생활을 했다지만 소극장에서 라이브 공연도 많이 했다. 그러던 그가 1998년 발표한 4집부터 많이 달라졌다. 노래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그의 주종목은 록에서 발라드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다소 꺼리던 방송 출연도 시작했다. ‘엔터테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솔직하다. 그런 것들에 대해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관객과 팬들이 원하면 완전히 망가져야죠” 그의 변(辯)이다. 5집과 6집이 나오는 동안 그는 완전히 떴다. 앨범은 수십만 장이 팔려나가며 콘서트는 전회 매진사례를 이룬다. 이제 그의 옛 팬들은 예전의 김장훈을 기대해봐야 별 소용이 없을 듯하다. 그는 절대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대중들은 그가 노래만 부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건 김장훈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화해’다. 그렇지만 그래도 일말의 아쉬움은 남는다. 이제 어느 정도 화해했으니 앞으로는 자신의 빛나던 노래재능도 되살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때 김장훈은 정말 노래만 불렀다. 그의 노래제목처럼. 적어도 그가 말하는 이른바 ‘소파 생활’을 할 때는 그랬다. 때는 대략 1994년에서 1997년 사이다. 경원대학교 영문과실 소파에 앉아 밤이건 낮이건 언제나 노래만 불렀다. 오죽했으면 옆 과실에서 자던 학우들이 새벽녘 느닷없이 포효하는 그의 거친 노랫소리에 놀라 깼다는 에피소드가 들릴까.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고단했던 소파 생활은 하지 않는다. 발라드 ‘나와 같다면’의 히트로 그는 지루했던 언더 아닌 언더 생활을 청산하고 주류 연예계에 입성했다. 이후 그가 보여준 활약은 참 눈부셨다. 처음 출발은 < 이소라의 프로포즈 >. 토크와 라이브가 결합된 이 프로그램은 김장훈의 진면목을 발휘하기에 아주 적합한 무대였다. 이승환, 박상민과 더불어 가요계 만담꾼 빅3라 할 정도로 말재주가 뛰어난 그는 이소라의 넋이 나갈 정도로 사람들을 웃겼다(어쩌면 ‘웃기다’는 것이 요즘 팬들에겐 처음 떠오르는 그의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이러한 김장훈의 ‘놀라운’ 재능이 소문나자 방송국들은 앞다퉈 그를 섭외 했다. 그의 노래 ‘나와 같다면’이 큰사랑을 받았지만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노래보단 그의 ‘입심’을 더 원했다. 김장훈은 그 요구를 가능한 한 모두 수용했다. 그래서 < 김혜수의 플러스 유 > 같은 토크쇼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 이소라의 프로포즈 >에서는 ‘최대 출연자’라는 영예도 얻었다. 이제 그는 노래만 부르지는 않는다. 종종 ‘개인기’도 척척 해내며, 팬들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망가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제 그를 엔터테이너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지만 예전의 그를 알던 일부 사람들은 그의 요즘모습을 보고 변절이라 욕한다. 도대체 그가 예전엔 무엇을 했다고 그런 비난을 하는 건지? 김장훈을 개그맨 정도로 여기거나 최근에 그를 알게된 사람들은 다들 그를 발라드 가수로 여기고 있다. 그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 그를 대중적으로 알린 ‘나와 같다면’이나 히트곡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Good-bye day’, ‘혼잣말’ 같은 노래들은 모두 발라드 곡들이다. 이렇듯 발라드 곡들을 부르는데 발라드 가수가 아니란 말인가? 애매하긴 하지만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이다. 김장훈은 1991년 처음 데뷔했다. 그는 로커였다. 그것도 목이 터져라 내지르는 창법을 구사하는 로커. 요즘도 간간이 그런 창법을 들려주지만 당시엔 요즘처럼 일정 음역 내에서 내지르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음역대를 소화하며 내지르는 것이었다. 록 보컬의 대가들인 전인권, 김현식을 존경했다니 알만 하지 않은가. 데뷔 당시는 물론이고 한참 후까지 그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몇 번 관심을 끈 적이 있긴 하다.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유작앨범이 불티나게 팔리던 1991년쯤이었다. 당시 김장훈은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호형호제하는 사이였지만 사촌관계는 아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미완성이었던 김현식의 7집에서 ‘다시 처음이라오’와 ‘사랑의 불씨’를 불러 화제를 모았다. 그는 김홍준 감독의 1994년 영화 < 장미빛 인생 >에서 조동익이 작곡한 주제곡 ‘아침을 맞으러’를 불러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아무튼 2집을 거쳐 3집 < 노래만 불렀지 >에 이르기까지 김장훈은 지금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밑바닥 생활을 전전했다. 노래만 부르던 시기였다. 소파 생활을 했다지만 소극장에서 라이브 공연도 많이 했다. 그러던 그가 1998년 발표한 4집부터 많이 달라졌다. 노래는 한결 부드러워졌고, 그의 주종목은 록에서 발라드로 바뀌었다. 그전까지 다소 꺼리던 방송 출연도 시작했다. ‘엔터테이너’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솔직하다. 그런 것들에 대해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관객과 팬들이 원하면 완전히 망가져야죠” 그의 변(辯)이다. 5집과 6집이 나오는 동안 그는 완전히 떴다. 앨범은 수십만 장이 팔려나가며 콘서트는 전회 매진사례를 이룬다. 이제 그의 옛 팬들은 예전의 김장훈을 기대해봐야 별 소용이 없을 듯하다. 그는 절대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대중들은 그가 노래만 부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건 김장훈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변절이 아니라 화해’다. 그렇지만 그래도 일말의 아쉬움은 남는다. 이제 어느 정도 화해했으니 앞으로는 자신의 빛나던 노래재능도 되살렸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