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려잡지

한국 유학의 새로운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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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1/01/08
Pages/Weight/Size 152*223*20mm
ISBN 9788964476413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녹려잡지』(鹿廬雜識)는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18세기 녹문 임성주의 글이다. 이 글은 그의 사후에 편찬된 ??녹문집?? 전 26권 13책 가운데 권19 「잡저」에 수록되어 있는데, 조선과 중국에서 다루어진 고금의 이기심성론에 대한 녹문의 사색이 고스란히 담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녹문 임성주는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한주 이진상, 노사 기정진과 더불어 조선이 낳은 성리학자 여섯 사람 곧 육대가(六大家)로 추앙된다. 그것은 그의 학문적인 뛰어남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자기 학통인 율곡의 이통기국설을 비판하고, 호론과 낙론의 문제점들을 파악하여 양자를 뛰어넘는 독특한 주장을 내세우며, 주자학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학문적 경향을 보인다. 이른바 학문적 자기 극복이고 진일보인 셈이다. 『녹려잡지』는 녹문의 바로 그러한 이기심성론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별로 길지 않은 이 글은 지금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원문으로만 읽힐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 번역되어 출간됨으로써 일반인들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Contents
발간의 글
축하의 글

리는 자연이다
기일분수라고 해도 안 될 것이 없다
담일청허 한 기는 어디에도 있다
본성의 선함은 그 기질의 선함이다
율곡의 이통기국론은 이기를 두 가지 사물로 본 것이다
사물에도 미발의 중이 있다는 나흠순의 주장은 옳지 않다
주자, 정이, 정호 모두 일음일양을 도라고 한다
신 아닌 것이 없다
도암, 공자를 바라며 위로 나아간 분
성경이 신이다
성과 태극은 다르지 않다
각구태극은 분수이다
정호는 이일과 분수의 성을 모두 말했다
나흠순은 중생과 부처가 성과 지각이 같다고 여겼다
성은 심과 하나이고 도이다
심과 성은 둘로 나눌 수 없다
형기가 있어야 심과 성을 말할 수 있다
율곡의 이통기국론과 담일청허설을 융통성 있게 봐야 한다
만물의 이치가 형색에 따라 다르다
만물 각각의 이치가 된 것이 본연이다
자취에서 본성을 알 수 있다
성즉리는 사물마다 갖고 있는 이치이다
이일분수를 분명히 살펴라
담일한 기가 유행하면서 정통하고 편색하고 탁박해진다

해제
Author
임성주,한국주자학회
1711년(숙종37)~1788년(정조12).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풍천(?川),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며, 송명흠(宋明欽)·송문흠(宋文欽)·김원행(金元行) 등과 교유하였다. 1733년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750년 익위사 세마가 되었고 이어 익위사 시직, 공조 좌랑, 임실 현감 등을 지냈다. 1758년 공주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 1762년 익위사 위솔이 되어 세손이었던 정조(正祖)를 보도하였다. 이후 사옹원 주부, 전주 판관, 성주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 사직하고 공주 녹문, 원주 산호(山湖) 등지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초년에는 스승인 이재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동조하였으나, 점차 기존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동실(理氣同實)의 이기론(理氣論)을 정립하여 조선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1845년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녹문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11년(숙종37)~1788년(정조12).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풍천(?川),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며, 송명흠(宋明欽)·송문흠(宋文欽)·김원행(金元行) 등과 교유하였다. 1733년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750년 익위사 세마가 되었고 이어 익위사 시직, 공조 좌랑, 임실 현감 등을 지냈다. 1758년 공주 녹문(鹿門)에 은거하였다. 1762년 익위사 위솔이 되어 세손이었던 정조(正祖)를 보도하였다. 이후 사옹원 주부, 전주 판관, 성주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774년 사직하고 공주 녹문, 원주 산호(山湖) 등지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초년에는 스승인 이재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 동조하였으나, 점차 기존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동실(理氣同實)의 이기론(理氣論)을 정립하여 조선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1845년 대사헌 겸 성균관좨주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녹문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