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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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6/10/09
Pages/Weight/Size 152*225*60mm
ISBN 9788961951425
Categories 사회 정치 > 국방/군사
Description
사드와 『전쟁론』

올 여름 살인적인 무더위에 일어난 ‘사드 논란’이 한반도를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한국의 안보를 위해 사드를 경북 성주에 배치해야 한다는 (그리고 배치 장소를 계속 바꾸는) 박근혜 정부와 사드의 한국 배치를 반대하는 국민 사이의 전쟁. 그렇다, 그것은 ‘전쟁’이다.
『전쟁론』에서 클라우제비츠는 말했다. ‘전쟁은 우리의 의지를 실현하려고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 행동’이라고.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는 자기 나라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미국의 의지를 한국 땅에 실현하고 관철하려고 미국을 대신하여 자국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언급했듯이, 한국의 안전 보장은 미국의 사드 배치 목적에 들어있지 않다. 또한 사드 배치 비용의 상당 부분은 한국 국민이 세금으로 부담하게 될 것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 북한은 남한을 강력하게 위협하고 중국은 남한에 보복을 예고하고 실행하고 있으니 한국의 안보는 오히려 더 불안해지고 있다.

『전쟁론』은 프로이센의 전쟁 이론가인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가 쓴 책으로 1832~1834년에 세 권으로 출판되었다. 서양의 정치사상, 국제정치, 전쟁철학, 군사학 분야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쟁론』은 클라우제비츠가 살아있을 당시에 유행한 이른바 실증적인 전쟁 이론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즉 전쟁을 물리적·기하학적인 요소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의 정신과 심리를 고려한 전쟁 이론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저서이다. 현대의 전쟁에 나타나는 공격과 방어, 전술과 전략의 형태는 200년 전과 크게 달라졌지만, 전쟁을 수행하는 인간의 정신은 여전히 중요하며 앞으로도 결정적인 요소로 남을 것이다.

옮긴이 김만수는 『전쟁론』 독일어 원전 제1권을 2006년에, 제2권과 제3권을 2009년에 국내 최초로 완역하였다. 그 이후 10여 년 만에 해설서 『전쟁론 강의』와 함께 『전쟁론』 번역의 전면개정완역판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번 개정판에서 옮긴이는 『전쟁론』 초판을 텍스트로 삼아 원전 텍스트에 더욱 충실하게 번역했다. 또한 초판 번역을 전면적으로 개정하고 해설을 전부 삭제하고 찾아보기를 크게 개선했다. 그림과 지도 등의 자료도 많이 실었다.

Contents
머리말의 차례

부인의 제1권 머리말
부인의 제3권 머리말
알리는 말
짧은 논설
저자의 말
저자의 머리말

편의 차례

제1권
제1편 전쟁의 본질
제2편 전쟁의 이론
제3편 전략 일반
제4편 전투

제2권
제5편 전투력
제6편 방어

제3권
제7편 공격(초안)
제8편 전쟁 계획

장의 차례

제1편 전쟁의 본질
제1장 전쟁이란 무엇인가?
제2장 전쟁의 목적과 수단
제3장 전쟁 천재
제4장 전쟁에 따르는 위험
제5장 전쟁에서 겪는 육체적인 고통
제6장 전쟁에서 얻는 정보
제7장 전쟁에서 겪는 마찰
제8장 제1편의 결론

제2편 전쟁의 이론
제1장 전쟁술의 분류
제2장 전쟁 이론
제3장 전쟁술 또는 전쟁학
제4장 방법론
제5장 비판
제6장 사례

제3편 전략 일반
제1장 전략
제2장 전략의 요소
제3장 정신적인 요소
제4장 중요한 정신력
제5장 군대의 무덕
제6장 대담성
제7장 인내심
제8장 수의 우세
제9장 기습
제10장 책략
제11장 병력의 공간적인 집결
제12장 병력의 시간적인 집결
제13장 전략적인 예비 병력
제14장 병력의 절약
제15장 기하학적인 요소
제16장 전쟁 행동의 중지
제17장 오늘날의 전쟁의 성격
제18장 긴장과 휴식

제4편 전투
제1장 개요
제2장 오늘날의 전투의 성격
제3장 전투 일반
제4장 계속
제5장 전투의 의의
제6장 전투의 지속 시간
제7장 전투의 승패의 결정
제8장 전투에 대한 양쪽의 합의
제9장 주력 전투
제10장 계속
제11장 계속
제12장 승리를 이용하는 전략적인 수단
제13장 전투에서 패배한 후의 후퇴
제14장 야간 전투

제5편 전투력
제1장 개요
제2장 군대, 전쟁터, 원정
제3장 병력의 비율
제4장 병과의 비율
제5장 군대의 전투 대형
제6장 군대의 일반적인 배치
제7장 전위와 전초
제8장 전진 부대의 행동 방식
제9장 야영
제10장 행군
제11장 계속
제12장 계속
제13장 사영
제14장 식량 조달
제15장 작전 기지
제16장 병참선
제17장 지형
제18장 고지

제6편 방어

제1장 공격과 방어
제2장 전술에서 공격과 방어의 관계
제3장 전략에서 공격과 방어의 관계
제4장 공격의 집중성과 방어의 분산성
제5장 전략적인 방어의 성격
제6장 방어 수단의 범위
제7장 공격과 방어의 상호 작용
제8장 저항의 유형
제9장 방어 전투
제10장 요새
제11장 앞 장의 계속
제12장 방어 진지
제13장 요새 진지와 보루 진지
제14장 측면 진지
제15장 산악 방어
제16장 계속
제17장 계속
제18장 하천 방어
제19장 계속
제20장 A. 습지 방어
B. 범람지
제21장 삼림 방어
제22장 초병선
제23장 나라의 관문
제24장 측면 행동
제25장 나라 안으로 하는 후퇴
제26장 인민 무장 투쟁
제27장 전쟁터의 방어
제28장 계속
제29장 계속. 점차적인 저항
제30장 계속. 결전을 하지 않는 경우에 전쟁터의
방어

제7편 공격(초안)
제1장 방어와 갖는 관계에서 본 공격
제2장 전략적인 공격의 성질
제3장 전략적인 공격의 대상
제4장 공격력의 감소
제5장 공격의 정점
제6장 적의 전투력의 파괴
제7장 공격 전투
제8장 도하
제9장 방어 진지의 공격
제10장 보루 진지의 공격
제11장 산악 공격
제12장 초병선의 공격
제13장 기동
제14장 습지, 범람지, 숲의 공격
제15장 결전을 하는 경우에 전쟁터의 공격
제16장 결전을 하지 않는 경우에 전쟁터의 공격
제17장 요새의 공격
제18장 수송대에 대한 공격
제19장 사영에 있는 적군의 공격
제20장 견제
제21장 침략
승리의 정점

제8편 전쟁 계획
제1장 머리말
제2장 절대 전쟁과 현실 전쟁
제3장 A. 전쟁의 내부적인 연관성
B. 전쟁의 목적과 노력의 정도
제4장 전쟁 목표의 자세한 정의. 적을 쓰러뜨리는 것
제5장 계속. 제한된 목표
제6장 A. 전쟁의 목표에 미치는 정치적인 목적의 영향
B.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다
제7장 제한된 목표. 공격 전쟁
제8장 제한된 목표. 방어
제9장 적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쟁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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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Author
카알 폰 클라우제비츠,김만수
1780년 6월 1일 프로이센의 작은 도시 부르크에서 중산층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12살의 나이에 소년병으로 입대한 그는 프랑스혁명 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벌인 싸움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했으며 1831년 11월 16일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군에서 보낸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1803년 베를린 정규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당시 프로이센군 개혁의 기수였던 사관학교 교장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중령의 총애를 받았으며 졸업 후 장교 생활 중에도 줄곧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클라우제비츠에게 샤른호르스트는 그의 말대로 “정신적인 아버지이자 친구”였다.
임관하자마자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천거로 프로이센의 젊은 황태자 아우구스트(August)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그는 궁중 출입을 자주 하면서 여왕의 시녀였던 마리 폰 브륄(Marie von Bruhl)을 만나 결혼했다.
1806년 나폴레옹군과 맞서 싸운 아우에르슈테트(Auerstadt) 전투에서 그는 황태자 아우구스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혀 1년 동안 파리에 억류되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뒤 그는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핵심 참모로 기용되었으며 프로이센군의 개혁과 개편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일련의 개혁 논쟁에서 인력 정책과 군기 및 훈련 제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당시 군내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그 바람에 과격주의자라는 평판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는 무엇보다도 프로이센 정부의 프랑스에 대한 굴욕적인 종속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 지원을 요구해 왔을 때 프로이센 정부가 너무 쉽게 그것을 수용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고서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조국의 군대를 떠났다.
1812년의 전쟁에서 그는 러시아군에 입대해 참전했다. 이때 그는 대령 계급이었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관전자 이상의 주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종전 무렵에 프로이센군 군단장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Yorck von Wartenburg) 장군을 찾아가 나폴레옹 군대에서 이탈, 전향하도록 설득함으로써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프로이센이 드디어 1813년에 반기를 들고 대(對) 프랑스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이보다 앞선 클라우제비츠의 행동들은 모두 정당화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는 클라우제비츠의 프로이센군 복귀 요청을 상당 기간 동안 거절했다. 그의 과거 돌출적 행동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에 복귀한 클라우제비츠는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百日天下) 시절에 제3군단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이 군단은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그루시(Grouchy) 군단을 묶어 놓는 중요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군부 내에서 늘 보수파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 최고위급 요직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1818년에 그는 당시 비교적 한가한 행정직인 베를린 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덕분에 오랫동안 중단한 연구를 재개함으로써 한직은 오히려 그를 위대한 전쟁 이론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스승 샤른호르스트의 전기를 집필하고 그 밖에 많은 독창적인 정치 및 군사 관련 논문들을 저술했다. 그리고 역작 ≪전쟁론≫을 집필하는데 1819년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에 걸쳐 온 정열을 다 바쳤다. 하지만 초고 집필을 마친 뒤, 세심하게 수정 작업을 하던 중에 1831년 콜레라에 감염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이듬해에 그의 부인이 유고를 모아 출판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전쟁론≫은 하나의 미완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1780년 6월 1일 프로이센의 작은 도시 부르크에서 중산층 가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12살의 나이에 소년병으로 입대한 그는 프랑스혁명 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벌인 싸움에서 처음으로 전투를 경험했으며 1831년 11월 16일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군에서 보낸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1803년 베를린 정규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당시 프로이센군 개혁의 기수였던 사관학교 교장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중령의 총애를 받았으며 졸업 후 장교 생활 중에도 줄곧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클라우제비츠에게 샤른호르스트는 그의 말대로 “정신적인 아버지이자 친구”였다.
임관하자마자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천거로 프로이센의 젊은 황태자 아우구스트(August)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그는 궁중 출입을 자주 하면서 여왕의 시녀였던 마리 폰 브륄(Marie von Bruhl)을 만나 결혼했다.
1806년 나폴레옹군과 맞서 싸운 아우에르슈테트(Auerstadt) 전투에서 그는 황태자 아우구스트와 함께 포로로 붙잡혀 1년 동안 파리에 억류되었다.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한 뒤 그는 샤른호르스트 장군의 핵심 참모로 기용되었으며 프로이센군의 개혁과 개편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일련의 개혁 논쟁에서 인력 정책과 군기 및 훈련 제도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당시 군내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주장을 많이 했다. 그 바람에 과격주의자라는 평판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런데 클라우제비츠는 무엇보다도 프로이센 정부의 프랑스에 대한 굴욕적인 종속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침공 지원을 요구해 왔을 때 프로이센 정부가 너무 쉽게 그것을 수용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고서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조국의 군대를 떠났다.
1812년의 전쟁에서 그는 러시아군에 입대해 참전했다. 이때 그는 대령 계급이었지만 언어 장벽 때문에 관전자 이상의 주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 그러나 종전 무렵에 프로이센군 군단장 요르크 폰 바르텐부르크(Yorck von Wartenburg) 장군을 찾아가 나폴레옹 군대에서 이탈, 전향하도록 설득함으로써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프로이센이 드디어 1813년에 반기를 들고 대(對) 프랑스 전쟁에 가담함으로써 이보다 앞선 클라우제비츠의 행동들은 모두 정당화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III)는 클라우제비츠의 프로이센군 복귀 요청을 상당 기간 동안 거절했다. 그의 과거 돌출적 행동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에 복귀한 클라우제비츠는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百日天下) 시절에 제3군단 참모장으로 근무했다. 이 군단은 워털루(Waterloo)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그루시(Grouchy) 군단을 묶어 놓는 중요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연합군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군부 내에서 늘 보수파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아 최고위급 요직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1818년에 그는 당시 비교적 한가한 행정직인 베를린 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덕분에 오랫동안 중단한 연구를 재개함으로써 한직은 오히려 그를 위대한 전쟁 이론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스승 샤른호르스트의 전기를 집필하고 그 밖에 많은 독창적인 정치 및 군사 관련 논문들을 저술했다. 그리고 역작 ≪전쟁론≫을 집필하는데 1819년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에 걸쳐 온 정열을 다 바쳤다. 하지만 초고 집필을 마친 뒤, 세심하게 수정 작업을 하던 중에 1831년 콜레라에 감염돼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이듬해에 그의 부인이 유고를 모아 출판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전쟁론≫은 하나의 미완성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