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문체와 사상의 혁명을 일으킨 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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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5/01/05
Pages/Weight/Size 150*210*30mm
ISBN 9788961673570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시대를 앞서간 조선 실학자의 청나라 여행기

《열하일기》는 조선시대 중기, 연암 박지원이 쓴 중국 기행문집이다. 1780년(정조 4년)에 삼종형인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의 황제, 건륭제의 칠순연 축하사절단 일원으로 동행하는 길에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적은 글이다.

조선 사신으로는 최초로 열하(현재 중국 헤베이성 청더시)까지 간 연암이 1780년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여정을 세세히 기록한 것으로 지리, 풍속, 토목, 건축, 인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천문 등등, 18세기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기행문이면서도 일기형식을 갖추었으며, 자신이 느낀 것을 솔직하게 담아내기 위해 속담, 민요, 소설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문학작품인 동시에 ‘이용후생’을 추구한 연암의 실학사상이 담겨 있는 철학서이자 실용서로 평가된다.
Contents
압록강을 건너서[도강록(渡江錄)] …… 019

구요동기(舊遼東記) / 관제묘기(關帝廟記) ) /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 광우사기(廣祐寺記)

성경잡지(盛京雜識) …… 079

속재필담(粟齋筆談) / 상루필담(商樓筆談) / 성경 가람기(盛京伽藍記) / 산천기략(山川記略)

일신수필(馹迅隨筆) …… 141

북진묘기(北鎭廟記) / 차제(車制) / 희대(戱臺) / 시사(市肆) / 점사(店舍) / 교량(橋梁) / 강녀묘기(姜女廟記) / 장대기(將臺記) / 산해관기(山海關記)

관내정사(關內程史) …… 201

이제묘기(夷齊廟記) / 호질(虎叱)

막북행정록(莫北行程錄) …… 248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270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298

부록 …… 311
Author
박지원,김문수
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18세였던 1754년(영조 30),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아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층의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그만 보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의 종로구 견지동)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자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1780년(정조 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이 결과 지어진 것이 『열하일기』이고, 이는 완성된 전권이 나오기 전부터 열띤 반응을 받았다. 50이 된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으로 관직을 맡게 되고 그 후 경상도 안의 현감安義縣監,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 등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지금의 충남 당진)의 군수 등으로 재직하며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진상했다.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으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양양 신흥사神興寺 승려들이 전횡하던 일로 상관인 관찰사觀察使와 의견이 맞지 않아 1801년 늙고 병듦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년(순조 5) 음력 10월 29일, 69세의 나이로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지금의 가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18세였던 1754년(영조 30),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아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층의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閣外傳』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그만 보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의 종로구 견지동)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자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1780년(정조 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이 결과 지어진 것이 『열하일기』이고, 이는 완성된 전권이 나오기 전부터 열띤 반응을 받았다. 50이 된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으로 관직을 맡게 되고 그 후 경상도 안의 현감安義縣監,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 등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지금의 충남 당진)의 군수 등으로 재직하며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진상했다.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으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양양 신흥사神興寺 승려들이 전횡하던 일로 상관인 관찰사觀察使와 의견이 맞지 않아 1801년 늙고 병듦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년(순조 5) 음력 10월 29일, 69세의 나이로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지금의 가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