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후 24년 동안 네 권의 시집을 출간하며 감각적이고 치열한 언어와 예리한 사회인식으로 사랑받아온 진은영 시인이 신작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을 펴낸다. 시인은 책의 서문에서 “내 빨간 수첩과 내 머릿속은 이렇게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한 타인의 문장들로 가득하다”라고 이야기한다. 쉽게 잠들지 못했던 밤과 죽고 싶었던 순간마다 자신을 살렸던 문장들이 있었고, 시인은 쉴 새 없이 그것들을 읽고 밑줄을 그으며 힘든 시간을 견뎠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고통과 회복의 기억이 희미해진 후에도 자신을 살게 했던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진은영이 호명하는 작가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카프카, 울프, 바흐만, 카뮈, 베유, 플라스, 아렌트…… 삶은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하고, 아무리 애써도 승리는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자각하면서도 전력으로 글을 썼던 작가들이다. 자신과 맞지 않는 세계 속에서 고유함을 잃지 않기 위해 분투했던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고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들의 책도 낡지 않고 살아남아, 현대 독자들의 영혼에도 균열을 낸다. 시인은 사랑하는 작가들의 책과 문장들을 살피며,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 속에서도 끝까지 단 한 사람을 걱정하는 문학의 안간힘에 대해서도 쓴다.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여기서 다룬 저자들은 다 그렇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_「책머리에」에서
Contents
책머리에 | 나는 세계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 포기하지 않는 읽기
체포됐어도 자유로운 K…… 차별금지법 없는 한국은? - 프란츠 카프카 『소송』
‘올랜도’도 버지니아도 성별 제약 없는 다양한 삶을 원했다 -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진리의 담지자를 자처하는 지도자여…… 그것은 카리스마 아닌 망상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유대인을 두려워한 철학이 유대인 천재들을 낳았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번번이 죽고 태어나는 경험으로 붐비는 곳, 문학 -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피해자의 슬픔을 응시하는 문학적 용기 - 잉에보르크 바흐만 『이력서』
삶도, 시도 중단할 수 없었던 러시아 국민시인 - 안나 아흐마토바 『레퀴엠-혁명기 러시아 여성시인 선집』
비극적 삶으로만 조명되기엔 황홀하고 치열한 실비아의 시 - 실비아 플라스 『에어리얼』
‘자기 자신’으로 존재했기에 사후에야 세상과 만난 디킨슨 -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예술가의 삶 아닌 냉철한 지성으로 성찰을 준 ‘할머니 시인’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끝과 시작』
자식이 어디선가 비명을 지르고 있기를 바라는 부모…… 시로 쓴 참혹한 희망 - 아리엘 도르프만 『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로 군국주의를 경계하다 - 이바라기 노리코 『처음 가는 마을』
하나도 잊지 않고 모든 것을 호명하는 다정함이 빚은 시 - 백석 『백석 시, 백 편』
삶의 가시는 시로 새 이야기가 된다…… 버스 운전사 패터슨처럼 -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패터슨』
너를 밀어내고 나를 드러내야 이기는 세계…… 시인은 ‘사라짐’으로 답했다 - 라이너 쿤체 『은엉겅퀴』
공정은 정말 공정한가…… 막연함에 저항한 ‘디디온식 글쓰기’ - 조앤 디디온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카뮈가 말한다 ‘비극은 자각해야 할 운명’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인간을 운명의 중력에서 뜯어내 영원으로 들어 올리는 것…… 시몬 베유의 ‘사랑’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자유로운 집이여 오라…… 힘없는 이들에 던지는 희망의 몽상 -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폭력적 현실에 띄우는 절박한 안부 - 존 버거 『A가 X에게』
사진, 과거와 현재가 함께하는 공존의 신비에 대하여 - 롤랑 바르트 『밝은 방』
먼저 떠난 오빠를 위한 192쪽의 기록…… 사랑은 기억이다 - 앤 카슨 『녹스』
예술을 ‘선물’하는 일, 그저 옛 인류의 순진한 발상일까 - 루이스 하이드 『선물』
삶의 습관으로 타인을 구원하는 인간…… 여우의 눈으로 포착하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주인과 하인」
돈과 행복을 신성화하는 조급한 현대인이여…… “신은 죽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릴케는 스승이 아닌 동료였기에 멘토가 되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진정한 스승은 설명하지 않는다 - 자크 랑시에르 『무지한 스승』
후배 학자의 비판적 인용을 통해 생명 얻은 그리스 철학자들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Author
진은영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전공 교수로 가르치며 시를 쓰고 있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냈고,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천상병 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받았다.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0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문학상담 전공 교수로 가르치며 시를 쓰고 있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냈고,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천상병 시문학상, 백석문학상 등을 받았다.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