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백석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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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0/01/30
Pages/Weight/Size 140*195*25mm
ISBN 9788954670319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백석 시의 가장 신뢰받는 정본

2007년 출간된 이래 백석 시의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본으로 자리매김한 『정본 백석 시집』이 개정판으로 새로이 출간되었다. 『정본 백석 시집』 출간 이후로도 백석 시 해설서 『백석 시를 읽는다는 것』과 백석 시어 사전 『백석 시의 물명고』, 백석의 수필과 소설을 정리, 해설한 『정본 백석 소설·수필』 등을 펴내며 백석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연구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해온 백석 연구의 권위자 고형진 교수는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반영해 정본의 표기와 어휘 풀이를 더욱 정확하게 다듬고, 초판 출간 이후 새로 발견된 백석의 시 「머리카락」을 보태 보다 완전한 백석 시의 정본을 확립했다. 『정본 백석 소설·수필』과 더불어 백석 문학세계의 전모를 온전한 형태로 갈무리한 귀중한 작업이다.
Contents
책머리에
일러두기

1부 사슴

정주성定州城
산지山地
주막酒幕

나와 지렝이
여우난골족族
통영統營
흰밤
고야古夜
가즈랑집
고방
모닥불
오리 망아지 토끼
초동일初冬日
하답夏畓
적경寂境
미명계未明界
성외城外
추일산조秋日山朝
광원曠原
청시靑?
산山비
쓸쓸한 길
석류石榴
머루밤
여승女僧
수라修羅
노루
절간의 소 이야기
오금덩이라는 곳
시기?崎의 바다
창의문외彰義門外
정문촌旌門村
여우난골
삼방三防

2부 함주시초咸州詩抄

통영統營
오리
연자간
황일黃日
탕약湯藥
이두국주가도伊豆國湊街道
창원도昌原道?남행시초南行詩抄 1
통영統營?남행시초南行詩抄 2
고성가도固城街道?남행시초南行詩抄 3
삼천포三千浦?남행시초南行詩抄 4
함주시초咸州詩抄
북관北關
노루
고사古寺
선우사膳友辭
산곡山谷
바다
추야일경秋夜一景
산중음山中吟
산숙山宿
향악饗樂
야반夜半
백화白樺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석양夕陽
고향故鄕
절망絶望

외갓집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물닭의 소리
삼호三湖
물계리物界里
대산동大山洞
남향南鄕
야우소회夜雨小懷
꼴두기
가무래기의 낙樂
멧새 소리
박각시 오는 저녁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동뇨부童尿賦
안동安東
함남도안咸南道安
구장로球?路?서행시초西行詩抄 1
북신北新?서행시초西行詩抄 2
팔원八院?서행시초西行詩抄 3
월림月林장?서행시초西行詩抄 4
목구木具

3부 흰 바람벽이 있어

수박씨, 호박씨
북방北方에서?정현웅鄭玄雄에게
허준許俊
『호박꽃 초롱』서시序詩
귀농歸農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조당?塘에서
두보杜甫나 이백李白같이
머리카락
산山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칠월七月 백중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원본

定州城
山地
酒幕

나와 지렝이
여우난곬族
統營
힌밤
古夜
가즈랑집
고방
모닥불
오리 망아지 토끼
初冬日
夏畓
寂境
未明界
城外
秋日山朝
曠原
靑?
山비
쓸쓸한길
?榴
머루밤
女僧
修羅
노루
절간의소이야기
오금덩이라는곧
?崎의 바다
彰義門外
旌門村
여우난곬
三防
統營
오리
연자ㅅ간
黃日
湯藥
伊豆國湊街道
南行詩抄(一) 昌原道
南行詩抄(二) 統營
南行詩抄(三) 固城街道
南行詩抄(四) 三千浦
咸州詩抄
北關
노루
古寺
膳友辭
山谷
바다
秋夜一景
山中吟
山宿
饗樂
夜半
白樺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夕陽
故鄕
絶望

외가집
내가생각하는것은
내가이렇게외면하고
물닭의소리
三湖
物界里
大山洞
南鄕
夜雨小懷
꼴두기
가무래기의 樂
멧새소리
박각시 오는 저녁
넘언집 범같은 노큰마니
童尿賦
安東
咸南道安
西行詩抄(一) 球?路
西行詩抄(二) 北新
西行詩抄(三) 八院
西行詩抄(四) 月林장
木具
수박씨, 호박씨
北方에서?鄭玄雄에게
許俊
「호박꽃초롱」序詩
歸農
국수
힌 바람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塘에서
杜甫나李白같이
머리카락

적막강산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七月백중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백석의 시세계와 시사적 의의
백석 시 원본의 언어와 표기법, 그리고 정본의 원칙
백석 시 작품 연보
백석 연보
낱말 풀이 참고서지
Author
백석,고형진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장 토속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모더니스트.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본명 백기행이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필명은 백석(白石)과 백석(白奭)이 있었는데 주로 백석(白石)을 많이 사용하였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이름 중 석을 택해서 썼다. 오산고보 재학 중 백석은 부친을 닮아 성격이 차분했으며 친구가 없었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경성문화 인쇄사에서 100부 한정판으로 찍었다. 윤동주는 백석 시집을 구할 수 없어 노트에 시를 필사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해방 전 천재 시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오산소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오산고보 졸업 후,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춘해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하였다. 김소월을 동경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웠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다. 1934년에 귀국하여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조선일보],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로, [여성사], [왕문사] 등에서 근무하며 시작 활동을 했다. 1935년 [조광]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시작 활동 외에도 많은 외서들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9년 [여성]지 편집 주간 일을 사직하고 고향인 평북 지역을 여행하였다. 1940년 만주의 신징(지금의 장춘)으로 가서 3월부터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1942년 만주의 안둥 세관에서 일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신의주를 거쳐 고향인 정주로 돌아왔다.

1946년 북조선예술총동맹이 결성된 후 1947년 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이 되었다. 이때부터 러시아 문학 번역에 매진했다. 1949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과 [조쏘문화] 편집위원을 맡으며 안정적인 창작활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7년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간행하였으나 1958년 ‘붉은 편지 사건’ 이후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면서 이후 창작과 번역 등 대부분의 문학적 활동을 중단했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을 치는 일을 맡으면서 청소년들에게 시 창작을 지도하고 농촌 체험을 담은 시들을 발표했으나, 1962년 북한 문화계에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창작 활동을 접었다.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백석은 일제 강점기에도 모국어를 지키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사슴』(1936)이 있으며, 대표 작품으로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 등이 있다. 북한에서 나즘 히크메트의 시 외에도 푸슈킨, 레르몬토프, 이사콥스키, 니콜라이 티호노프, 드미트리 굴리아 등의 시를 옮겼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수록된 시 「통영」, 「적막강산」, 「북방」 등 백석의 대표작들은 실향 의식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한국의 대표 모더니즘 시인으로 평가받는 백석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