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이 온 유럽의 옛 체제를 파괴로 이끌어간다고 주장한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 성찰」과 프랑스군 점령하의 베를린에서 나라와 민족의 자부심을 절절한 호소한 요한 피히테의 연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한 권에 담았다.
보수주의의 고전으로 꼽히는 「프랑스 혁명 성찰」은 에드먼드 버크가 영국의 프랑스혁명 지지자들을 비판하고, 동시에 영국에 대한 그 영향으로부터 지배층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킬 의도로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변설, 수사의 힘을 모두 쏟아 쓴 글이다. 정치인식에 깊게 뒷받침된 이념으로서 강한 논리성과 설득력을 갖춘 그의 글은 점차 유럽 근대 정치사상사의 고전으로서 부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요한 피히테의 연설 「독일 국민에게 고함」은 프랑스문화에 대한 독일인·독일문화의 우수성을 설명하고 이것을 국민들에게 알려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당시 독일을 재건하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하는 명연설이었다. 그의 주장에 들어 있는 민주주의적·공화주의적 요소 때문에 이 강연 내용을 담은 책의 재발간이 금지되었지만, 칸트의 순수이성·실천이성과 결합하여 지식학 또는 칸트체계를 완성한 그의 철학 사상이 그대로 담긴 연설은 오늘날에도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Contents
프랑스혁명 성찰 -에드먼드 버크
머리글
제1부
제2부
에드먼드 버크의 생애와 사상
독일 국민에게 고함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1강 예고와 전체의 개관
2강 새로운 교육 일반의 본질에 대하여
3강 새로운 교육의 두 번째 서술
4강 독일인과 다른 게르만족 사이의 주요 차이점
5강 앞서의 차이점에서 오는 결과
6강 역사에 나타난 독일인의 특성
7강 민족의 근원성과 독일적 자질에 관한 보다 깊은 파악
8강 참다운 국민이란 무엇인가, 조국애란 무엇인가
9강 독일인의 새로운 국민교육 어떠한 점과 결합되어야 하는가
10강 독일 국민 교육의 좀더 상세한 설명
11강 이 교육의 실행은 누가 맡을까
12장 우리의 취지를 관철하기 위해 취할 수단에 대하여
13장 지난번 강연의 계속
14장 결론
피히테의 생애와 사상
Author
에드먼드 버크,요한 피히테,박희철
18세기 영국의 정치인이자 문필가이다. 20대 후반인 1756년과 1757년에 각각 『자연 사회의 옹호』와 『숭고와 미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발표하였다. 특히 후자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0대 중반에 정치에 입문하여 30년간 휘그당 하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1770년대에는 영국 왕 조지 3세의 독재와 미국에 대한 과세를 반대하면서 미국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지지했다. 1780년대에는 인도 총독 헤이스팅스와 동인도회사 직원의 비리와 범죄를 규탄하면서 헤이스팅스의 탄핵을 주장했다. 에드먼드 버크가 미국독립혁명을 지지하고 인도 총독 헤이스팅스의 탄핵을 주도한 것은 영국 입헌군주제의 정치 전통을 건강하게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1790년에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을 써서 프랑스혁명을 비판했다. 1791년 토마스 페인은 그에 대한 반론으로 『인권』을 썼고, 이로써 근대 보수-진보 논쟁의 원형이 된 논쟁이 시작되었다. 버크는 토마스 페인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인 「신 휘그가 구 휘그에 올리는 호소」를 써서 ‘전통을 지킨’ 영국의 명예혁명을 근거로 프랑스혁명이 ‘전통을 버린’ 것을 비판하였다. 이로써 버크는 근대 보수주의 사상을 대변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사상가가 되었다. 1794년 헤이스팅스 탄핵이 실패하자 하원의원직에서 사퇴하였다. 같은 해 정치인의 사명에 관한 「대의정치의 사명과 양심」을 썼다. 1795년 자신의 국가 경제학이라 할 경제정책 제안서인 「궁핍에 관한 소견과 세부 고찰」을 썼다. 1797년에 별세하였다.
18세기 영국의 정치인이자 문필가이다. 20대 후반인 1756년과 1757년에 각각 『자연 사회의 옹호』와 『숭고와 미 관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발표하였다. 특히 후자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30대 중반에 정치에 입문하여 30년간 휘그당 하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1770년대에는 영국 왕 조지 3세의 독재와 미국에 대한 과세를 반대하면서 미국 식민지인들의 저항을 지지했다. 1780년대에는 인도 총독 헤이스팅스와 동인도회사 직원의 비리와 범죄를 규탄하면서 헤이스팅스의 탄핵을 주장했다. 에드먼드 버크가 미국독립혁명을 지지하고 인도 총독 헤이스팅스의 탄핵을 주도한 것은 영국 입헌군주제의 정치 전통을 건강하게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1790년에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을 써서 프랑스혁명을 비판했다. 1791년 토마스 페인은 그에 대한 반론으로 『인권』을 썼고, 이로써 근대 보수-진보 논쟁의 원형이 된 논쟁이 시작되었다. 버크는 토마스 페인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인 「신 휘그가 구 휘그에 올리는 호소」를 써서 ‘전통을 지킨’ 영국의 명예혁명을 근거로 프랑스혁명이 ‘전통을 버린’ 것을 비판하였다. 이로써 버크는 근대 보수주의 사상을 대변하는 거의 유일한 정치사상가가 되었다. 1794년 헤이스팅스 탄핵이 실패하자 하원의원직에서 사퇴하였다. 같은 해 정치인의 사명에 관한 「대의정치의 사명과 양심」을 썼다. 1795년 자신의 국가 경제학이라 할 경제정책 제안서인 「궁핍에 관한 소견과 세부 고찰」을 썼다. 1797년에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