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마저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 밤, 여우 한 마리가 먹이를 찾아 숲 속을 헤매 다닙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숲 속은 뼛속까지 시리도록 춥고 쥐 죽은 듯 고요합니다. 겨울을 나느라 조금 야윈 듯도 한 여우는 운 좋게 눈 위에 점점이 박힌 토끼 발자국을 발견하고 뒤를 밟습니다. “앗, 저기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토끼를 본 여우는 온 힘을 다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토끼는 언덕 꼭대기에서 하늘 높이 뛰어 오르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요? 허탈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여우의 발아래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비한 숲입니다.
여우는 배고픔도 잊고 홀린 듯 숲으로 들어갑니다. 이 신비한 숲에서 여우를 맞아 준 것은 가족과 함께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입니다. 민들레가 한 가득 핀 들판에서 따스한 봄바람을 맞으며 엄마 젖을 배불리 먹던 기억, 달맞이꽃이 흐드러진 들판에서 달빛을 받으며 형제들과 신나게 뛰놀던 기억,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절의 행복한 기억들이 여우의 눈앞을 스쳐 갑니다. 그것은 어쩌면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이 불러들인 환영인지도 모릅니다. 그 환영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여우는 영영 봄을 맞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우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숲을 빠져나와 새벽을 맞습니다. 아무 걱정 없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유혹을 이겨 낸 여우에게는 값진 보상이 주어집니다. 새벽빛으로 물들어 가는 들판에서 새로운 가족을 함께 꾸려 갈 짝을 만난 것입니다. 머지않아 눈이 녹고 봄이 오면 귀여운 아기 여우들이 태어날 테지요. 그리고 여우도 더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부모 품을 떠나 홀로 세상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 그림책 속 여우처럼 말입니다. 그때까지는 이 그림책을 그저 눈 덮인 겨울 산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작은 여우 이야기로 읽어도 좋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부모 품을 떠나 홀로 세상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일이 몹시도 버겁게 느껴질 때, 다시 이 그림책을 떠올려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림책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격려와 위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