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부터 조선일보의 경영에 참여하여 빚더미 신문사를 개혁하기 위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신문사 원로들에게 '선배님들 물러나주십시오' 하고 쓴 눈물의 편지 이야기로 시작되는 자서전에는 한국현대사와 함께 해 온 55년의 세월이 실려 있다.
선우휘와 이영희의 필화사건, 조선일보 불매운동 등 권력과 언룬의 숨가쁜 대결과 알려지지 않았던 내막, 열정적인 신문기자들과 자신이 만났던 대통령, 당대 최고의 요정을 배경으로 펼쳐진 흥미진진한 정치야화 등을 담았다.
Contents
제1장/ 선배님들 물러나 주십시오
1)빚더미 신문사로 돌아오다
2)“선배님들 물러나 주십시오”
3)조선일보 제호만 빼고 다 바꿔라
4)시위대와 함께 농성하는 기자들
5)“조선일보는 분명히 반대했습니다”
제2장/ 신문전쟁이 시작됐다
1)4등 신문의 설움
2)신문전쟁이 시작됐다
3)하네다공항의 비밀 공수작전
4)활자를 뽑고 납을 녹이며
5)한국 최초의 컬러신문을 만들다
6)6년 만에 갖게 된 사장실
7)현대건설 정주영 사장과의 배짱 담판
8)1등 신문이 되다
제3장/ 시대의 빛과 그림자
1)선우휘?·이영희 필화사건
2)신문사 사장이 끌려가 맞은 게 무슨 자랑이오?
3)캠페인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4)울음으로 부르짖은 함석헌
5)연산군이냐 대원군이냐
6)신문에 ‘세계’를 넣어라
7)10월유신과 언론 암흑의 시대
8)주필의‘반란’
9)언론 담당 장관들과의 전쟁과 평화
10)청룡야구와 프로야구
11)월간조선의 탄생
제4장/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멍에
1)기자들의 신문제작 거부
2)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멍에
3)깨어진 잔칫상
4)말 많고 탈 많았던 언론청문회
5)조선일보 불매운동이라니
6)재벌이 정권까지 잡는다면
7)가마니 깔고 신문 만들 각오
제5장/ 조선일보의 가장 큰 재산
1)25시를 사는 제제다사(濟濟多士)
한국의 게리 쿠퍼, 홍종인/‘앵선생’이라 불린 깐깐한 원칙주의자, 성인기/전화기 내던지는 33세 편집국장, 천관우/멋쟁이, 그러나 빈털터리 진보 정치인, 고정훈/‘天才 위의 夫才’, 부완혁
2)‘사설이 강한 신문’을 만든 논객들
20세기 ‘언론자유 영웅’, 최석채/여권 받고 감격한 ‘상처받은 언론인’, 조덕송/투사가 된 선비 ‘송진사’, 송건호/세상 휘저으며 바람처럼 산 풍운아, 송지영
3)신문에 미친 신문쟁이들
너무 인간적이라 허점도 많았던 선우휘/내가 화내면 조용히 참을 ‘忍’자 건네던 유건호/‘사장, 편집국에 그만 좀 내려오세요’ 하던 신동호/이규태의 ‘삼불(三不) 원칙’/정보부가 뗀 목 청와대가 붙인 안병훈/천생 기자인 ‘별종’, 김대중/아버지는 ‘반동’인데 아들은 ‘용공’, 류근일/신문을 끓게 만든 ‘최틀러’, 최병렬
4)조선일보 기자가 되려면
제6장/ 내가 본 대통령들
1)내가 뱀띠라 천성이 차갑습니다(박정희)
2)귀거래사를 읊던 고독한 대통령(최규하)
3)사람 하나는 기막히게 쓸 줄 아는 사람(전두환)
4)북방정책 홍보 잘해달라고 부탁(노태우)
5)배짱, 고집, 예민한 감성(김영삼)
6)“대통령 되려면 세 가지 해결하라”(김대중)
제7장/ 편집국장이 꿈이었지요
1)나의 경쟁자, 나의 스승
2)지당 장관, 낙루 장관, 병신 장관
3)기자의 쓴맛과 단맛
4)첫 해외취재의 추억
5)나 장가 안 갑니다
6)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7)세상을 요리한 요정들의 이야기
제8장/ 나를 키운 것은 어머니의 기도
1)일등 다음으로 또 번영해라
2)‘못된 망종’ 소리를 듣던 반항아
3)“큰놈은 빨갱인데 작은놈은 내 편”
4)나를 키운 것은 어머니의 기도
5)넘을 수 없는 큰 산, 계초 방응모
제9장/ 신문 밖의 인생
1)신문협회의 안과 밖
2)시대를 함께 부대낀 신문 발행인들
3)연세대 동문 ‘돈우영’입니다
4)그해 여름 중국으로 간 까닭은
5)내 인생의 여백
6)낚시 예찬
7)사냥, 기다림의 싸움
8)연설공부 하는 남자
9)“무식한 놈이 좋은 책은 다 있네”
Author
방우영
언론인이자 경영인. 1928년 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사인 방재윤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금광 사업으로 큰돈을 번 조부(계초 방응모)가 1932년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방우영은 ‘신문사 집 아이’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경신고를 거쳐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한 후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신문사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편집국 교열부 기자를 거쳐,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8년간 활동하다 1960년 조선일보 방계회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아 청춘영화 전성시대를 열면서 빚더미에 빠져있던 극장을 흑자로 돌려놓았기도 했다.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해 이후 전무, 사장, 회장을 거치며 탁월한 경영 감각과 강한 추진력으로 조선일보의 비약을 일궈냈다. 1962년 6만 5천 부에 불과하던 조선일보 발행 부수는 3년 후 20만 부로 늘었고, 1970년대 중반 정상에 올라 1979년 100만 부, 1992년 200만 부를 돌파하며 1등 신문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방우영은 ‘기자 같은 경영자’이다. 스스로 수많은 기획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조선일보에 24년간 연재된 「이규태 코너」도 그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는 기자들의 반항적 기질을 높이 샀고, 글쟁이들의 괴짜 기질을 좋아하고 품어주었다. 대학 시절 복싱부에서 활동한 만능 스포츠맨이면서 늘 책을 끼고 있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4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써 온 그의 일기는 곧 현대사의 기록이다. 그는 선이 굵은 보스이면서도 꼼꼼하고 눈물도 많다. 권위와 허식을 싫어하고 어디서나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
현재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맡고 있으며, 연세대 재단이사장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연세대 명예동문회장,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 한독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언론인이자 경영인. 1928년 1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학교 교사인 방재윤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금광 사업으로 큰돈을 번 조부(계초 방응모)가 1932년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방우영은 ‘신문사 집 아이’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경신고를 거쳐 연희전문 상과를 졸업한 후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신문사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편집국 교열부 기자를 거쳐,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8년간 활동하다 1960년 조선일보 방계회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아 청춘영화 전성시대를 열면서 빚더미에 빠져있던 극장을 흑자로 돌려놓았기도 했다.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신문사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해 이후 전무, 사장, 회장을 거치며 탁월한 경영 감각과 강한 추진력으로 조선일보의 비약을 일궈냈다. 1962년 6만 5천 부에 불과하던 조선일보 발행 부수는 3년 후 20만 부로 늘었고, 1970년대 중반 정상에 올라 1979년 100만 부, 1992년 200만 부를 돌파하며 1등 신문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방우영은 ‘기자 같은 경영자’이다. 스스로 수많은 기획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조선일보에 24년간 연재된 「이규태 코너」도 그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그는 기자들의 반항적 기질을 높이 샀고, 글쟁이들의 괴짜 기질을 좋아하고 품어주었다. 대학 시절 복싱부에서 활동한 만능 스포츠맨이면서 늘 책을 끼고 있는 독서광이기도 하다. 40여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써 온 그의 일기는 곧 현대사의 기록이다. 그는 선이 굵은 보스이면서도 꼼꼼하고 눈물도 많다. 권위와 허식을 싫어하고 어디서나 말하는 데 거침이 없다.
현재 조선일보 명예회장을 맡고 있으며, 연세대 재단이사장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연세대 명예동문회장,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 한독협회 명예회장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