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의 언어에 맞서는 시/언어로 누구보다 통렬하게 당대를 비판하고 또 앞질러온 시인 김혜순의 시론을 묶은 『여성, 시하다』(2017)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79년에 등단해 12권의 시집을 펴내는 내내 김혜순은 남성 중심의 지배적 상징질서를 충실히 구현해온 언어에서 자신의 몸-말을 꺼내어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로 확장시켜왔다. 분열적이고 산포되는 이미지의 연쇄, 단어와 단어가 부딪쳐 일으키는 파동, 타자와 함께 자신을 재구축하는 다성적이고 역동적인 목소리의 형태를 띤 김혜순의 시는, ‘현실이 없는 시는 없다’는 그 자명한 명제를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듯, ‘언어에 새겨진 문명과 문화의 기획, 권력과 체제의 논리, 통념과 관습의 폭력성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그러한 언어의 본성에 저항하며’(문학평론가 오연경) 길어낸 산물이다.
하여 김혜순의 시론은 그가 독창적이고 상상적인 언술로 갱신해온 한국 현대시의 미학이 도달한 지점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가부장적 사회의 법과 문학적 보편성의 논리에 갇혀 해석되고 연출되고 박제되어온 여자의 몸, 여성시에 대한 본질적이고도 제대로 된 독법의 필요성과 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일찍이 여성적 글쓰기의 원천과 욕망, 사랑과 숙명에 대해 절박하게 묻고 답했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2002) 이후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 ‘여성이 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답하며, 나아가 여성시인과 작가의 목소리가 남다른 발성법과 언어 체계와 상상력을 지니고 있음을 구체적 문학적 사례(강은교, 고정희, 김승희, 김정란, 최승자의 시와 오정희의 소설 등)를 들며 입증해내는 길고 짧은 글 10편이 시론집 『여성, 시하다』에 묶였다.
여성시인들이 쓰는 존재론적이고도 방법론적인 그 시적 발성의 주름 깊은 곳에 어떠한 심리적인 왜곡이나 피해자 의식, 악전고투가 숨어 있는지 따로 밝혀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혐오나 교묘한 질시에 대한 내상을 드러내는 고백들 너머 여성시는 왜 가상의 피륙을 짜고 있는지, 텍스트의 짜임 속에 비밀을 감추고, 수치를 일구기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 위장하는지, 어떻게 다른 시적 영토를 발견하고 그 장소를 운행하는지, 화자의 설정과 그 문체의 결과 틀의 구축이 고백의 내용보다 더한 고백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방이 되는지, 심지어 그 장소 없는 장소에서 어떻게 탈주체화를 실현하는지, 혹은 그 자리에서 공동체마저 꿈꾸고 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 뒤에―한사코 사이에 있으려는」, 230쪽)
Contents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쓰레기와 유령
귀, 안으로의 무한
나의 지옥, 나의 뮤즈
시인은 가라
산 자의 신화
여성, 시하다
여성시와 유령 화자
복수의 몸
책 뒤에-한사코 사이에 있으려는
Author
김혜순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만든 기괴한 이미지들과 속도감 있는 언어 감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김혜순이 시를 통해 끈질기게 말하는 것은 죽음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뜻없음, 지옥에 갇힌 느낌이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개체의 종말로서의 현상적,실재적 죽음이 아니라, 삶의 내면에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앉은 관념적,선험적 죽음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어느 별의 지옥』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어느 별의 죽음』은 세계의 무목적성에 대한 오랜 응시로 삶에 예정되어 있는 불행을 눈치채버린 이의, 삶의 텅 빔과 헛됨, 견딜 수 없는 지옥의 느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관주의적 상상력이 빚어낸 시집이다. 그의 시 세계는 일상적이고 자명한 것의 평화와 질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난폭하게 찌르고 괴롭힌다.
김혜순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초등 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원도 원주에 이사해 거기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원주여고를 거쳐 1973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처음 써 본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선하고, 이어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대학 졸업 뒤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3년 「김수영 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98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낯설고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그의 시세계는 비로소 문단의 공인을 받는다. 2019년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를 수상했다.
김혜순 시의 착지점은 '몸', 그것도 해탈이 불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해탈이 불가능한 몸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식육적 상상력으로까지 뻗친다. 이런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블랙유머에 바탕을 둔 경쾌한 악마주의"의 시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기 시의 발생론적 근거를 '여성'과 '여성의 몸'에서 찾는다. 이에 대해 그는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절대 해탈이 불가능하다. 여성은 식민지 상황에서 살고 있다. 사회학적 요인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식민지성이 있다. 이때의 여성은 인식론적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여성이다."라고 말한다.
대상을 주관적으로 비틀어 만든 기괴한 이미지들과 속도감 있는 언어 감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김혜순이 시를 통해 끈질기게 말하는 것은 죽음에 둘러싸인 우리 삶의 뜻없음, 지옥에 갇힌 느낌이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개체의 종말로서의 현상적,실재적 죽음이 아니라, 삶의 내면에 커다란 구멍으로 들어앉은 관념적,선험적 죽음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이 『어느 별의 지옥』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어느 별의 죽음』은 세계의 무목적성에 대한 오랜 응시로 삶에 예정되어 있는 불행을 눈치채버린 이의, 삶의 텅 빔과 헛됨, 견딜 수 없는 지옥의 느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관주의적 상상력이 빚어낸 시집이다. 그의 시 세계는 일상적이고 자명한 것의 평화와 질서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의 의식을 난폭하게 찌르고 괴롭힌다.
김혜순은 1955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초등 학교에 입학할 무렵 강원도 원주에 이사해 거기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원주여고를 거쳐 1973년 건국대학교 국문과에 들어가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78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처음 써 본 평론 「시와 회화의 미학적 교류」가 입선하고, 이어 1979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인」,「도솔가」등의 시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대학 졸업 뒤 「평민사」와 「문장」의 편집부에서 일하던 그는 1993년 「김수영 시 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98년 '김수영 문학상'을 받음으로써, 낯설고 이색적이어서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던 그의 시세계는 비로소 문단의 공인을 받는다. 2019년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 문학상(Griffin Poetry Prize)를 수상했다.
김혜순 시의 착지점은 '몸', 그것도 해탈이 불가능한 '여성의 몸'이다. 해탈이 불가능한 몸에서 출발한 그의 시적 상상력은 때때로 그로테스크한 식육적 상상력으로까지 뻗친다. 이런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블랙유머에 바탕을 둔 경쾌한 악마주의"의 시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는 자기 시의 발생론적 근거를 '여성'과 '여성의 몸'에서 찾는다. 이에 대해 그는 "식민지에 사는 사람은 절대 해탈이 불가능하다. 여성은 식민지 상황에서 살고 있다. 사회학적 요인이 아니라 유전자에 새겨진 식민지성이 있다. 이때의 여성은 인식론적 여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여성이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