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파 이론가, 범민련 사무처장
# 한국 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서사(敍事) 중 민주화운동 세대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든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의 헌법 개정을 끌어냈다. 대통령 5년 단임제인 대한민국 6공화국 헌법 체제는 지난 30여 년간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민경우는 ‘6월 항쟁’ 때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의 거리 시위를 기획했다. 이후 통일연대 사무처장과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남측본부)을 10년(1995-2005년)간 활동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번 수감됐으며, 4년 2개월간 감옥에서 보냈다.
민경우는 2019년 ‘조국 사태’라는 사건을 맞닥뜨린다. 지난 30여 년간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온 긍지와 믿음이 송두리째 흔든 사건이다. “나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운동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다 가는 것을 열망했다.”던 필자다. 민경우는 민주화운동의 정직한 복원기인 ?86세대의 민주주의_민주화운동과 주사파(주체사상) 권력의 기원?을 집필했다. 주체사상과 주사파 이론가답게 주사파 운동권의 전개 과정과 대중운동, 조직과 주체사상, 그리고 386과 민주화 등 5부로 나눠 분석했다. 특유의 통찰력으로 분석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대안을 제시한다.
주체사상(주사파)은 북한정통론의 역사관이다. 구한말 의병투쟁-일제하 무장투쟁-미완의 혁명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관이다. 일제강점기를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로 양분하고, 독립운동 중 김일성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구성한 역사다. 근현대사를 재배치한 이 역사관은 1980년대 중반 학생 운동권에 도입됐다. ‘이념과 사상보다는 사람’을 강조하며 “역사에서 누구를 존경하느냐?”는 주사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주체사상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학생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사파는 통일운동으로 연결하는데 성공하지만, ‘식민지’라는 강령에 갇히게 되고 관념적 과격 주사파로 이어진다.
# 필자 프로필: 2012년 민주화운동을 접고 수학 선생으로 활동하던 중, 586 주사파 권력의 잘못된 실체를 보면서 중도성향의 시민단체인 미래대안행동(미대행)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의예과를 중퇴하고, 같은 대학 국사학과를 입학해 5년 만에 졸업했다. 현재 민경우수학연구소장. 저서로는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수학 관련 도서 다수. 정통 시사 월간지 〈신동아〉 〈586 컬럼〉 연재 중. 1965년 서울 출생.
민경우의 민주화 운동사
# 1983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했지만, 입학 후 역사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중퇴하고, 이듬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에는 서울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을 지냈다. 이후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을 지냈고, 당시 북한에 보낼 서신을 일본을 거쳐 북으로 보내는 게 주요 업무였다. 그는 ‘제도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으면, 기득권 세력이 되는 것’이라는 평소 소신으로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1997년 범민련이 이적단체(利敵團體)로 지정되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안기부(현 국정원)에 붙잡혀 두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총 4년 2개월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 후, 노무현 정부 때는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지냈다.
#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수많은 그룹들로 분열돼 있던 NL 운동권에서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로 평가되면서, 수많은 NL계 조직들이 참여한 범민련과 통일연대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게 된다. NL계열들이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합류하던 흐름을 맞춰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자주파(NL)가 당을 완전 장악한 상태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정책기획팀장을 맡게 된다. 이때 한미 FTA 반대 운동을 펼쳐 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NL운동권 바깥의 주요 인사들을 만난다. 언론과 학계의 서적과 보고서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굳게 신봉하던 주체사상과 민족의식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20년간 NL운동에 헌신해 온 활동가 경험으로 2009년 발행한?진보의 재구성》에서 NL 운동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고, NLPDR 이념이 현 시대 상황에 맞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NL노선은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현실과 많은 괴리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성경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 같은 풍토가 NL 진영에 만연해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토론하고 학습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졌다.” 며 NL운동권 전반을 비판한다.
#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등 근본적이 질문을 던지며, NL계열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이후 운동가로 살아왔던 30년의 삶을 완전히 접고, 2012년부터 수학 학원을 운영하며 《수학 공부의 재구성》 등 여러 수학 교육에 관한 책을 다수 썼다.
주사파 이론가, 범민련 사무처장
# 한국 현대사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서사(敍事) 중 민주화운동 세대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만든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의 헌법 개정을 끌어냈다. 대통령 5년 단임제인 대한민국 6공화국 헌법 체제는 지난 30여 년간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다. 민경우는 ‘6월 항쟁’ 때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의 거리 시위를 기획했다. 이후 통일연대 사무처장과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남측본부)을 10년(1995-2005년)간 활동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번 수감됐으며, 4년 2개월간 감옥에서 보냈다.
민경우는 2019년 ‘조국 사태’라는 사건을 맞닥뜨린다. 지난 30여 년간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온 긍지와 믿음이 송두리째 흔든 사건이다. “나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운동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싸우다 가는 것을 열망했다.”던 필자다. 민경우는 민주화운동의 정직한 복원기인 ?86세대의 민주주의_민주화운동과 주사파(주체사상) 권력의 기원?을 집필했다. 주체사상과 주사파 이론가답게 주사파 운동권의 전개 과정과 대중운동, 조직과 주체사상, 그리고 386과 민주화 등 5부로 나눠 분석했다. 특유의 통찰력으로 분석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대안을 제시한다.
주체사상(주사파)은 북한정통론의 역사관이다. 구한말 의병투쟁-일제하 무장투쟁-미완의 혁명과 분단으로 이어지는 역사관이다. 일제강점기를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로 양분하고, 독립운동 중 김일성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구성한 역사다. 근현대사를 재배치한 이 역사관은 1980년대 중반 학생 운동권에 도입됐다. ‘이념과 사상보다는 사람’을 강조하며 “역사에서 누구를 존경하느냐?”는 주사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주체사상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학생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사파는 통일운동으로 연결하는데 성공하지만, ‘식민지’라는 강령에 갇히게 되고 관념적 과격 주사파로 이어진다.
# 필자 프로필: 2012년 민주화운동을 접고 수학 선생으로 활동하던 중, 586 주사파 권력의 잘못된 실체를 보면서 중도성향의 시민단체인 미래대안행동(미대행)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의예과를 중퇴하고, 같은 대학 국사학과를 입학해 5년 만에 졸업했다. 현재 민경우수학연구소장. 저서로는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수학 관련 도서 다수. 정통 시사 월간지 〈신동아〉 〈586 컬럼〉 연재 중. 1965년 서울 출생.
민경우의 민주화 운동사
# 1983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했지만, 입학 후 역사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중퇴하고, 이듬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1987년에는 서울대 인문대학 학생회장을 지냈다. 이후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을 지냈고, 당시 북한에 보낼 서신을 일본을 거쳐 북으로 보내는 게 주요 업무였다. 그는 ‘제도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으면, 기득권 세력이 되는 것’이라는 평소 소신으로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1997년 범민련이 이적단체(利敵團體)로 지정되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안기부(현 국정원)에 붙잡혀 두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총 4년 2개월간 감옥에서 보냈다. 출소 후, 노무현 정부 때는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지냈다.
#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수많은 그룹들로 분열돼 있던 NL 운동권에서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로 평가되면서, 수많은 NL계 조직들이 참여한 범민련과 통일연대에서 오랜 기간 활동하게 된다. NL계열들이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합류하던 흐름을 맞춰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자주파(NL)가 당을 완전 장악한 상태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의 정책기획팀장을 맡게 된다. 이때 한미 FTA 반대 운동을 펼쳐 가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NL운동권 바깥의 주요 인사들을 만난다. 언론과 학계의 서적과 보고서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굳게 신봉하던 주체사상과 민족의식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20년간 NL운동에 헌신해 온 활동가 경험으로 2009년 발행한?진보의 재구성》에서 NL 운동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고, NLPDR 이념이 현 시대 상황에 맞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NL노선은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현실과 많은 괴리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성경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 같은 풍토가 NL 진영에 만연해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토론하고 학습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졌다.” 며 NL운동권 전반을 비판한다.
#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등 근본적이 질문을 던지며, NL계열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이후 운동가로 살아왔던 30년의 삶을 완전히 접고, 2012년부터 수학 학원을 운영하며 《수학 공부의 재구성》 등 여러 수학 교육에 관한 책을 다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