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 of Print

동양평화론

비판정본
$16.20
SKU
9791196727918

 

본 상품은 품절 / 절판 등의 이유로 유통이 중단되어 주문이 불가합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Free shipping over $100]

Standard Shipping estimated by Fri 05/31 - Thu 06/6 (주문일로부 10-14 영업일)

Express Shipping estimated by Tue 05/28 - Thu 05/30 (주문일로부 7-9 영업일)

* 안내되는 배송 완료 예상일은 유통사/배송사의 상황에 따라 예고 없이 변동될 수 있습니다.
Publication Date 2019/06/15
Pages/Weight/Size 145*205*15mm
ISBN 9791196727918
Description
이 책 『동양평화론 東洋平和論』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거 후 1910년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집필한 미완성의 글이다. 원래는 동양평화론서 東洋平和論序, 전감 1 前鑑 一, 현상 2 現狀 二, 복선 3 伏線 三, 문답 4 問答 四 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그 중 ‘동양평화론서’와 ‘전감’만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동양평화에 대한 안중근 의사의 담대한 생각을 살필 수 있었다.

이 책의 목적은 대한민국과 동양의 현대 역사에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지닌 가치와 의의를 다시 되새김하는 데 있다. 또한 서구 열강의 패권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의 침략주의, 그리고 이런 야심을 숨기고 한일병탄을 주도한 이등박문 伊藤博文 의 ‘극동평화론’에 대응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원대하고 담대한 기획을 제시하는데, 그 기획은 사실 이에 막 시작되었고, 한반도의 통일과 동양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평화체제를 구축하며 마무리될 것이다. 비록 ‘서문’과 ‘전감’만 완성하고 본론에 해당하는 ‘현상’, ‘복선’, ‘문답’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 본론은 말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현실로 완성될 것이다.

또한 본문의 해제에는 안중근 의사가 쓰지 못한 부분을 여러 문헌을 토대로 추정해보았다. 즉 ‘현상’을 채웠을 말들은 무엇이었을까?, ‘복선’은 내용으로 구성되었을까?, ‘문답’에는 어떤 물음과 답변으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질문을 여러 문헌을 대조하여 재구성한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이 책은 또한 그동안 출판된 여러 편집본들과 필사본들을 서양고전문헌학의 방법론에 입각해서 고증하고 대조해서 만든 비판 정본이라는 점에서, 믿고 인용할 수 있는 원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둘 수 있다.
Contents
해제 이게, 참평화이다 I 안재원
일러두기
「동양평화론」비판정본
「동양평화론」원문대역

부록
「동양평화론」필사본

근대 용어해설
참고문헌
찾아보기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보게 도운 사람들
Author
안중근,곽문석,김태주,김은숙,안재원,윤재성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안응칠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6세 때 가족이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으며, 학문보다 사냥에 뜻이 있어 명사수로 성장했다. 16세 때인 1896년 김아려와 결혼해 이후 2남1녀를 두었고, 이듬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7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이때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평양에서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이후 연해주로 가서 의병대열에 참가해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투쟁에 나셨다. 1909년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는데, 이때 이들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붉은 피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을 새겼다. 그해 10월 26일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옥중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며, 이 중 『동양평화론』은 형이 집행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안응칠로 불렸고 해외생활 중에도 이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6세 때 가족이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했으며, 학문보다 사냥에 뜻이 있어 명사수로 성장했다. 16세 때인 1896년 김아려와 결혼해 이후 2남1녀를 두었고, 이듬해에 천주교에 입교해 세례를 받고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27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들을 모아 국권회복을 도모했다. 이때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평양에서 삼합의라는 광산회사를 설립해 산업 진흥운동에도 매진했다. 이후 연해주로 가서 의병대열에 참가해 대한의군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투쟁에 나셨다. 1909년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동의단지회’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는데, 이때 이들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태극기에 붉은 피로 ‘大韓獨立’(대한독립)을 새겼다. 그해 10월 26일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조선통감부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1910년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옥중에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으며, 이 중 『동양평화론』은 형이 집행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