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 시선 7

노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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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2/11/30
Pages/Weight/Size 128*188*0mm
ISBN 9791128867026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독일의 시성(詩聖) 괴테의 시를 모은 『괴테 시선』 제7권은 「노년의 시」다. 동시대 시인들, 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영향을 받았던 과거와 달리, 노년의 시는 자생적으로 발전해 나간다. 세계관은 더욱 깊어지고, 현실적인 것은 정화되어 상징이 된다. 노년의 지혜가 드러나는 격언시, 당시 사교계와 괴테의 교유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인물시, 괴테의 세계관이 담긴 시, 아름다운 서정시를 소개한다. 원숙한 시인의 정신세계와 정련된 기교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Contents
격언시 Spruche

I. 신과 자연 Gott?Welt
II. 인간의 모습
III. 실천적 삶의 지혜
IV. 자화상
V. 예술
VI. 학문
VII. 정치
VIII. 험담

인물시 Gedichte an Personen

라인강과 마인강 RHEIN UND MAIN
성탄절 WEIHNACHTEN
1828년 신년을 맞아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께 Dem Großherzog Carl August zu Neujahr 1828
마리아 폰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주님께 IHRO HOHEIT DER PRINZESSIN MARIA VON SACHEN-
신조 SYMBOLUM
1825년 9월 3일 프리메이슨 축하연에 부쳐 ZUR LOGENFEIER DES DRITTEN SEPTEMBER 1825
기품 있는 형제 잔치에 DEM WURDIGEN BRUDERFESTE
1817년 10월 31일에 부쳐 DEM 31. OKTOBER 1817
폰 포이크트 장관님께 HERRN STAATSMINISTER VON VOIGT
블뤼허 폰 발트슈타트 후작께 그의 지지자들이 DEM FURSTEN BLUCHER VON WALDSTADT DIE SEINEN
카를 하라흐 백작에게 GRAFEN KARL HARRACH
카스파 슈테른베르크 백작에게 An den Grafen Kaspar Sternberg
1816년 6월 6일 DEN 6. JUNI 1816
티티네 오도넬 백작 부인에게 DER GRAFIN TITINNE ODONELL
슈타인 부인에게 An Frau von Stein
파니 카스퍼스에게 AN FANNY CASPERS
율리에 에글로프슈타인 백작 부인에게 JULIEN GRAFIN EGLOFFSTEIN
여행 축복 REISESEGEN
폰 실러 양에게 AN FRAULEIN VON SCHILLER
마리아네 폰 빌레머에게, 1831년 3월 3일 An Marianne von Willemer, den 3. Marz 1831
바이런 경에게 AN LORD BYRON
주먹은 강하고… Stark von Faust...
15명의 영국 친구들에게 DEN FUNFZEHN ENGLISCHEN FREUNDEN
하워드의 기상학을 위한 3부작 Trilogie zu Howards Wolkenlehre
대기 Atmosphare
하워드를 명예롭게 기억하며 Howards Ehrengedachtnis
잘 기억할 것 Wohl zu merken
열렬한 젊은 자연의 친구인 두 형제에게 AN ZWEI GEBRUDER, EIFRIGE JUNGE NATURFREUNDE
요한 다니엘 바게너에게 An Johann Daniel Wagener
배우 크뤼거에게 Dem Schaupieler Kruger
손자 발터 폰 괴테의 방명록에 In das Stammbuch des Enkels Walter v. Goethe
어느 동판화를 위해 Zu einem Kupferstich
비유담 PARABEL
코체부에게 AN KOTZEBUE
그대는 왜 코체부와 싸우지 않는가… Warum bekampfst du nicht den Kotzebue...
눈살을 찌푸린 엄격한 남자… Ein strenger Mann, von Stirne kraus...
대답 Erwiderung
그들은 본질적으로 한통속이다… Verwandte sind sie von Natur...

세계관을 담은 시들 Die weltanschaulichen Gedichte

머리말 Prooemion
신이란 무엇인가… Was ware ein Gott...
파라바제 PARABASE
에피레마 EPIRRHEMA
안트에피레마 ANTEPIRRHEMA
틀림없이 그렇다 ALLERDINGS
원초적인 말. 오르페우스풍으로 URWORTE. ORPHISCH
파리아 PARIA
파리아의 기도 Des Paria Gebet
성담(聖譚) Legende
파리아의 감사 Dank des Paria
엄숙한 납골당에서… Im ernsten Beinhaus...
학문과 예술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Wer Wissenschaft und Kunst besitzt...
눈이 태양처럼 밝지 않으면… War nicht das Auge sonnenhaft...
진실이나 우화로… Was als Wahrheit oder Fabel...
무한한 것 안에서 같은 것이… Wenn im Unendlichen dasselbe...
지상 위를 떠도는 수호신 SCHWEBENDER GENIUS UBER ERDKUGEL
낮에는 천정(天頂)과 먼 곳이… Wenn am Tag Zenit und Ferne
하나이자 모든 것 EINS UND ALLES
유언 VERMACHTNIS
비밀들 Die Geheimnisse

만년의 서정시 Die spate Lyrik

1년 내내 봄 FRUHLNG UBERS JAHR
3월 MARZ
눈과 눈을 마주 보고 BLICK UM BLICK
한밤중에 UM MITTERNACHT
두 세계 사이에서 ZWISCHEN BEIDEN WELTEN
언제나 어디서나 IMMER UND UBERALL
성(聖) 네포무크 축일 전날 저녁 ST. NEPOMUKS VORABEND
방랑자의 축복 WANDERSEGEN
상징적인 그림들을 위한 시들 GEDICHTE ZU SYMBOLISCHEN BILDERN
빌헬름 티슈바인의 목가적 풍경화 WILHELM TISCHBEINS IDYLLEN
바람에 울리는 하프들 AOLSHARFEN
나 자신에게서 달아날 수만 있다면!… Konnt’ ich vor mir selber fliehn!...
아아! 다시 건강해지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Ach! wer doch wieder gesundete!...
깃펜과 화살은 물론 같은 것이기 때문에… Denn freilich sind’s dergleichen Kiel’ und Pfeile...
울리케 레베초에게 An Ulike Levetzow
열정의 3부작 TRILOGIE DER LEIDENSCHAFT
베르테르에게 An Werther
비가 Elegie
화해 Aussohnung
신랑 DER BRAUTIGAM
시골풍으로 LANDLICH
중국과 독일의 계절과 하루 CHINESISCH-DEUTSCHE JAHRES- UND TAGESZEITEN
말 없는 고통은 저절로 드러나는 법이다… Es spricht sich aus der stumme Schmerz...
떠오르는 보름달에게 DEM AUFGEHENDEN VOLLMONDE
이른 아침, 계곡과 산과 정원이… Fruh, wenn Tal, Gebirg und Garten...

잡지 ≪카오스≫에 실린 시들 Aus der Zeitschrift ≪Chaos≫

만약 태양신 포이부스의 말들이 너무 빨리… Wenn Phobus Rosse sich zu schnell...
마리아네 폰 빌레머에게, 1826년 10월 24일 An Marianne von Willemer, 24. 10. 1826
선한 것에 대한 기억은… Angedenken an das Gute...
엄청난 양의 물줄기들이… Wasserstrahlen reichsten Schwalles...
새로운 세이렌 요정 DIE NEUE SIRENE
그녀에게 AN SIE
그녀에게 AN SIE
방명록에 써 준 시들 Stammbuchverse
모두가 연극을 보려고 나와서… Jeder geht zum Theater heraus...
그대가 그대를 위해 좋은 삶의 집을 지으려 한다면… Willst Du Dir ein gut Leben zimmern...
기억 ERINNERUNG
마리아네 폰 빌레머에게, 1830년 4월 14일 An Marianne von Willemer, 14. 4. 1830
어느 앨범에 IN EIN ALBUM
지질학적 감사 GEOGNOSTISCHER DANK
감사한 답변 DANKBARE ERWIDERUNG
그대에게 어제가 분명하고 또 열려 있다면… Liegt dir Gestern klar und offen...
존경하는 열여덟 프랑크푸르트 축제 친구들에게 DEN VEREHRTEN ACHTZEHN FRANKFURTER FESTFREUN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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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Author
요한 볼프강 폰 괴테,임우영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고전파의 대표자이자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1749년 8월 28일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한 황실 고문관이었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엘리자베트 사이에서 부족할 것 없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라틴어 등 어학에 뛰어났으며 독서량도 많았다. 어렸을 때 라틴어와 그리스어,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영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승마와 사교춤도 배웠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학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괴테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1765년부터 1768년까지 당시 “작은 파리”라고 부르던 유행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공인 법학 강의보다 문학 강의를 더 열심히 들었다. 1770년 독일 질풍노도 운동의 실질적 선도자인 고트프리트 헤르더를 만나 독일 민속과 정신에 대한 깨우침을 얻었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마친 후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프랑크푸르트에서 작은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더 사로잡혀 있었다.

이때 쓴 작품은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괴츠 폰 베를리힝겐』과 『초고 파우스트』와 같은 드라마와, 문학의 전통적인 규범을 뛰어넘는 찬가들을 쓰게 된다. ‘질풍노도’ 시대를 여는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이 1773년 발표되자 독일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독일에서 드라마의 전통적인 규범으로 여기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 극을 따르지 않고 최초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을 모방했기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의 왕까지 가세한 이 논쟁으로 인해 괴테는 독일에서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768년 건강상의 이유로 요양 생활을 했는데, 그 무렵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위해 머물다가 헤르더를 알게 되면서 셰익스피어 문학에도 심취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772년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때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는 아픔을 겪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44)을 써, 문단에 이름을 떨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때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발표되자 괴테는 일약 유럽에서 유명 작가가 되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젊은 작가를 만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몰려들었다. '슈투름 운트 드랑'(질풍노도시대, 문예의 혁명 운동)의 대표작으로서 전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알려졌다. 1775년 제2의 고향이 되는 바이마르로 가서 공작의 고문이 되고 1782년에는 귀족 반열에 들었다. 1786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괴테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고전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1794년부터 실러가 기획한 잡지에 협력하여 우정을 맺은 괴테는 이후 실러의 격려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에 다시 손을 댄 것도 이 시점이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던 괴테를 18세에 불과했던 바이마르(Weimar)의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1757∼1828) 공작이 초청했다. 처음에는 잠시 체류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아버지의 권유대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괴테는 이미 유럽에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로 그곳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빌란트(Wieland)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바이마르의 예술적 분위기와 첫눈에 반해 버린 슈타인 부인의 영향으로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괴테에 대한 공작의 신임은 두터웠고 공국의 많은 일들을 그에게 떠맡기게 되었다.

여러 해에 걸친 국정 수행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으로 심신이 지친 괴테는 작가로서의 침체기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마르 궁정을 벗어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감행했다. 1년 9개월 동안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괴테가 느꼈던 고대 예술에 대한 감동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고대 미술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도와 절제의 정신을 자기 문학을 조절하는 규범으로 삼아 자신의 고전주의(Klassik)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 문학사에서는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1788년부터 실러가 죽은 1805년까지를 독일 문학의 최고 전성기인 “고전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괴테와 실러는 바이마르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고전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활동을 했는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유형(類型)”을 통해 “유형적인 개성”으로 고양(高揚)되는 과정을 추구했던 것이다. 괴테와 실러의 상이한 창작 방식은 상대의 부족한 면을 보충해 주어 결과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실러의 격려와 자극으로 괴테는 소설『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1796년에 완성하고, 프랑스 혁명을 피해 떠나온 피난민들을 소재로 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1797년에 발표해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미완성 상태의 『파우스트』작업도 계속 진행해 1808년에 드디어 1부를 완성하게 된다.

실러는 지나친 의욕과 격무로 인해 1805년 5월 46세의 나이로 쓰러지는데, 실러의 죽음은 괴테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1815년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나자 바이마르 공국은 영토가 크게 확장되어 대공국이 되었다. 괴테는 수상의 자리에 앉게 되지만 여전히 문화와 예술 분야만을 관장했다. 1823년『마리엔바트의 비가』를 쓴 이후로 괴테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저술과 자연연구에 몰두해 대작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1829)와『파우스트 2부』(1831)를 집필하게 된다. 서사시와 서정시, 산문과 시극, 비평과 수기, 4편의 소설과 1만여 통의 편지를 남긴 괴테는 독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의 태동기에 독일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832년 3월 22일 낮 1시 반, 괴테는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다. 그는 죽을 때 “더 많은 빛을(Mehr Licht)” 하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3월 26일 바이마르의 카를 아우구스트 공작이 누워 있는 왕릉에 나란히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