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스 루만은 사회적인 것(the social)을 소통을 가지고 파악하며, 사회를 모든 소통의 총체로서 파악한다. 소통은 인간의 의식이나 의도에서부터 비롯되기는 하지만, 실현된 후에는 의식이나 의도로부터 독자적인 것으로 작용하는 어떤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여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실현된 사회는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며 인간을 소외시킨다.
근대사회에서 정치적인 것은, 형성되는 근대 민족국가들을 중심으로 하여 집합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겠다는 인민들의 욕구에서 비롯된 특수한 소통이다. 그런 소통은 전체 사회의 소통으로부터 대리인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소통으로서 분화독립화되고, 그러한 특수 소통은 여러 현실적인 정치제도들, 사상들, 관행들의 발원지가 된다. 헌법, 민주주의, 정당제도, 국가는 이상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들의 특수 소통의 실현을 위해 제도화되었지만,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기모순적 현실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지배의 역설”(270쪽)인 것이다.
정치적 소통은 처음에는 보수냐 진보냐의 질문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나중에는 여당이냐 야당이냐의 질문을 중심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래서 역설적인 민주주의 제도는 정상이 쪼개진 비개연적인 모습을 취한다. 정치의 잘못과 성공은 국가와 정치인의 잘못으로 귀속될 수 없다. 정치는 유권자로서 권력을 위임하는 인민들과, 그러한 인민들의 대리인이 되겠다는 정치인들 사이의 소통으로 분화독립화되고 (결코 진보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는 의미에서) 진화되며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 결정은 오롯이 여당과 국가의 생산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정치적 결정은 여당/여당의 중심부와 시민사회/여론의 주변부로 구성된 중심/변방의 구조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정치제도의 성공을 희망한다면, 근대사회의 이러한 특수소통의 한계를 직시하는 데서 출발하여야 한다. 즉 근대사회에서는 정치가 사회의 중심이 아니다. 근대사회에서는 경제는 희소한 자원의 배분이라는 문제 해결을 위해 성립된 지불/비지불 소통의 총체로서, 바로 그러한 특수소통에 의해 결정된다. 근대사회에서 학문은 사회와 다른 기능체계에서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겠다는 목적에서 성립된 진리/허위 소통의 총체로서, 바로 그러한 특수소통에 의해 결정된다. 근대사회의 사람들은 사회의 인정을 받겠다는 욕구를, 한 개인과 모든 것을 공유하는 둘만의 친밀체계에서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특수소통들은 인간의 그러한 욕구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물론이며, 자기 이외의 다른 특수소통과 무관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근대사회의 정치제도의 성공을 희망한다면, 제도권 정당에 대해 정치 이념을 실현하라고 요구하기보다, 정책과 결정을 기회주의적이지만 실용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도록 관용하여야 한다. 또한 정치는 예를 들어 경제의 성과와 작동을 무력화하는 정책을 제안해서는 안 된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고백하면서, 유권자들은 정치의 원천적인 무능함을 전제하는 데서 정치소통을 새로이 출발하여야 한다.
Contents
제 1 장, 사회의 정치: 문제제기
제 2 장, 권력매체
제 3 장, 분화독립화와 정치체계의 작동적 폐쇄
제 4장 , 정치적 결정
제 5장 , 정치적 기억
제 6 장, 정치체계의 국가
제 7 장, 정치적 조직들
제 8 장, 여론
제 9 장, 자기기술들
제 10 장, 구조적 연결들
제 11 장, 정치적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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