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유교의 역사를 체계화시켜 하나의 정형화된 도식으로 만든 작품으로, 공자와 유교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유교의 창립, 공자와 유교의 관계, 유교와 제자백가의 투쟁, 유교의 전파와 사상 통일 등 유교의 성립과 전개에 관한 일련의 과정은 물론, 그 과정에서 상호 관계를 맺었던 제자백가의 양상까지도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당시에 활동했던 거의 모든 제자백가의 성립과 활동 등에 관한 핵심 원전 텍스트가 망라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상호 대립과 투쟁, 조화와 융합의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제18권?유가와 묵가가 가장 흥성하여 병칭되다儒?墨最盛竝稱考
1. 유가와 묵가가 가장 흥성하다[儒?墨最盛]
2. 유가와 묵가가 병칭되다[儒?墨幷稱]
제19권?노나라 전체가 유교를 따르다魯國全從儒敎考
1. 노나라 사람들이 유교를 따른 것에 대한 통론[魯人從儒通論]
2. 공자가 성인의 명예를 얻자 국내외에서 모두 칭송하다[孔子負聖人之譽, 中外皆稱之]
3. 공자가 노나라에서 관리가 되어 도를 행하다[孔子爲吏行道于魯]
4. 노나라 사람들이 모두 공자의 교설에 복종하다[魯人盡服孔子之敎]
5. 노나라에서 공자의 자손?제자?후학을 존경하다[魯尊敬孔子子孫?弟子?後學]
6. 노나라의 유생들이 전국?진?한나라 시대에 가장 흥성하다[魯儒生戰國?秦?漢尤盛]
제20권?유교가 천하에 두루 전파되어 전국?진?한나라 시대에 가장 흥성하다儒敎遍傳天下戰國?秦?漢時尤盛考
1. 공자의 제자와 후학들이 천하에 널리 유교를 전파하다[孔子弟子?後學遍傳儒敎於天下]
2. 천하가 모두 공자를 숭상하고 유교에 복종하다[天下皆尊慕孔子服從儒敎]
3. 유교가 전국시대에 성행하다[儒敎盛行于戰國]
4. 유교가 진나라 시대에 성행하다[儒敎盛行于秦]
5. 유교가 한나라 초기에 성행하다[儒敎盛行于漢初]
제21권?한무제 이후 유교가 사상을 통일하다漢武帝後儒敎一統考
1. 한무제가 제자백가를 축출하고 유교만을 숭상하다[漢武帝罷黜百家, 專崇儒敎]
2. 한무제 이후 공자를 특별히 존숭하여 특별한 예법을 더해 높이다[漢武後, 特尊孔子, 加崇異禮]
3. 한무제 이후 유교 학술을 숭상하여 공자의 학교 제도가 성행하다[漢武後, 崇尙儒術, 盛行孔子學校之制]
4. 한무제 이후 유교 학술을 숭상하여 공자의 선거 제도가 성행하다[漢武後, 崇尙儒術, 盛行孔子選擧之制]
5. 양한시대의 황제 및 제후왕들이 모두 경전을 익히고 유교 학술에 능통하다: 황후 부록[兩漢帝者及諸侯王皆受經通儒術: 皇后 附]
6. 양한시대 황제들이 제유들에게 오경을 바로잡아 학술을 통일하라는 조서를 자주 내리다[兩漢帝者屢詔諸儒評定五經以一學術]
7. 양한시대 조정 의론에 유생들을 많이 초빙하다[兩漢廷議多召儒生]
8. 양한시대 학인들이 모두 유교를 따르다[兩漢學人皆從儒敎]
9. 양한시대 지방 관리들이 모두 유교 학술로 백성을 교화하다[兩漢郡吏皆以儒術化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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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캉유웨이,김동민
청나라 말기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로, 廣東省 南海 출신이다. 자신의 고향에 사숙 萬木草堂을 열어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변법유신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표출했고, 梁啓超와 陳千秋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후 北京과 上海에서 勉學會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公車上書’를 올려 변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1897년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워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로 개혁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98년에는 그의 ‘變法自彊策’이 光緖帝에게 수용되어 戊戌變法이라는 개혁을 직접 주도했다. 그러나 100일 남짓한 기간 만에 袁世凱의 배반과 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100일 變法’으로 끝나버렸고, 康有爲는 梁啓超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 保皇會를 조직하여 황제의 복위를 시도하거나 孔敎國敎化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청나라 말기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로, 廣東省 南海 출신이다. 자신의 고향에 사숙 萬木草堂을 열어 강연과 저술 등을 통해 변법유신에 대한 정치적 성향을 표출했고, 梁啓超와 陳千秋 등의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그 후 北京과 上海에서 勉學會를 조직하여 구체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자, ‘公車上書’를 올려 변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1897년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배워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가로 개혁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다음 해인 1898년에는 그의 ‘變法自彊策’이 光緖帝에게 수용되어 戊戌變法이라는 개혁을 직접 주도했다. 그러나 100일 남짓한 기간 만에 袁世凱의 배반과 西太后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쿠데타로 ‘100일 變法’으로 끝나버렸고, 康有爲는 梁啓超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 保皇會를 조직하여 황제의 복위를 시도하거나 孔敎國敎化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로 끝났다. 1913년 중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