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편의 기사, 1991년 8월 11일자 [아사히신문]과 2014년 2월 6일호 [주간문춘]
1991년 8월 11일, 당시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 사회부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는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판에 전 조선인 종군‘위안부’ 가운데 한 명이 정대협에 처음으로 체험을 증언했다는 기사를 한국 언론보다 먼저 보도한다. 3일 후, 이 여성은 김학순金學順이라는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피해 체험을 증언한다. 이 증언이 계기가 되어 피해자들이 잇따라 실명으로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2014년 1월 말, 일본의 대형 주간지인 [주간문춘週刊文春]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한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교수(도쿄기독교대학)의 코멘트를 담은 기사를 내보낸다(2014년 2월 6일호). 기사에서 니시오카 교수는 우에무라의 기사가 ‘정신대’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고 ‘위안부’ 강제연행이 있었던 것처럼 쓰고 있어 “날조 기사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나아가 “잘못된 기사로 일한관계뿐 아니라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를 악화시킨 아사히의 책임은 매우 중대”하다면서 [아사히신문]에까지 책임을 묻는다. 이 기사로 인해 [아사히신문] 조기퇴직 후 대학으로 전직하려던 우에무라 전 기자의 계획은 좌절된다. 해당 대학에 “우에무라를 그만두게 하라” 등의 항의 메일이 밀려들어 교수 취임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게 된다.
『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우에무라 다카시 전 기자의 ‘위안부’ 최초 보도, 그리고 그 후』(일본어판 원서 『진실-나는 ‘날조 기자’가 아니다-私は[捏造記者]ではない』(岩波書店, 2016))는 이 같은 우에무라 공격의 기록이자 그에 대한 반증 등을 담은 투쟁의 기록이다. 또한 저자 우에무라 다카시가 지금까지 한국과 맺어온 관계를 담은 자서전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경험을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차분하게 되짚는다. 그러면서 강한 어조로 말한다. “나는 날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Contents
한국어판에 부쳐
1장 닫혀버린 전직의 길
전직처를 잃다|[주간문춘]의 취재 방식|대학 교원을 향한 꿈|아사히신문사와의 교섭
2장 ‘날조’라 불린 기사
‘녹음 테이프’에서 시작된 기사|1990년 여름, 허탕으로 끝난 위안부 취재|김학순 할머니가 전면에 나서다|또 하나의 기사, 기생학교 경력을 쓰지 않은 이유
3장 한국?조선과의 만남
교토에서 본 금색 불상|조선인과 연대한 시인 ‘마키무라 고’|우애학사의 날들|[아사히신문] 기자 신분으로 서울에 어학연수|[서울유학생통신] 발행|이카이노에서의 생활과 취재|김대중 씨와 고바우 영감
4장 반전공세, 싸움의 시작―부당한 공격에는 지지 않는다
[아사히신문]의 검증 기사 게재|“지지 마라 우에무라!”|한 줄기 빛, 차별과 싸우는 이들과의 만남|작은 대학의 큰 결단―협박에 지지 않겠다고 표명한 호쿠세이학원대학|변호인단 탄생, 소송의 긴 여정이 시작되다
5장 ‘날조’라는 딱지가 ‘날조’
니시오카 쓰토무 씨에 대한 반증|[요미우리]와의 대결|결국 실리지 않은 [요미우리신문] 인터뷰|허위와 오해에 근거한 [산케이]의 공격|[산케이]는 ‘강제연행’이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아비루 씨 등과의 인터뷰
6장 새로운 싸움을 향해
도쿄지방법원에서 명예훼손 소송이 시작됐다|첫 의견진술|미국 횡단 여행―6개 대학에서 강연|역사학자들의 성명이 든든한 지원군으로|삿포로에서의 싸움|서전의 승리|망향의 동산|가교를 목표로
마치며
자료
1_관련 기사
2_위안부 문제를 보도한 주요 기사 가운데 ‘정신대’라는 표현이 나오는 부분
3_위안부 문제와 우에무라를 둘러싼 경위(연표)
4_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게재한 각 신문의 보도 내용
5_‘위안부’ 첫 보도한 우에무라 전 기자 심층인터뷰
6_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