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제3권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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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9115612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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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5/01/16
Pages/Weight/Size 153*224*22mm
ISBN 9791156120353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그린 역사서 『몸젠의 로마사』는 기존의 로마사 연구서와 달리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좀 더 실증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몸젠은 1902년 12월 이 『로마사』로 독일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역사 연구서가 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은 『로마사』가 가진 의미, 즉 『로마사』가 역사 연구서를 넘어서는 인문학적 교양의 결실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몸젠의 로마사 제3권 : 이탈리아 통일에서 카르타고 복속까지』는 지난 2013년 4월, 10년 내 완역본 출간을 목표로 『몸젠의 로마사 제1권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출간한 후 선보이는 세 번째 결실이다. 로마의 탄생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1권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원서 제1권 제1책),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를 다룬 『몸젠의 로마사 제2권 : 로마 왕정의 철폐에서 이탈리아 통일까지』(원서 제1권 제2책)에 이어 제3권(원서 제1권 제3책 1장~7장)에서는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성장한 페니키아 인들과 로마 인들의 전쟁을 다룬다.
Contents
옮긴이 서문

제1장 카르타고
페니키아 인|무역|페니키아 인들의 재능|페니키아 인의 정치 의식|카르타고|카르타고의 패권|카르타고의 아프리카 영토|페니키아계 리뷔아|카르타고의 해상 패권|히스파니아|사르디니아|시킬리아|해상 패권|쉬라쿠사이와의 경쟁|카르타고의 국체: 원로회의와 관리들|판관단|시민|정부의 성격|카르타고의 자본력|로마와 카르타고의 비교|국가체제|민중에 대한 태도|국가 재정|군사 체계

제2장 로마와 카르타고의 시킬리아 쟁탈전
시킬리아의 상황|캄파니아 용병|마메르 용병|쉬라쿠사이의 히에론|마메르 용병의 이탈리아 연방 가입|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히에론과의 강화|아크라가스 함락|해전의 시작: 로마 해군 함대의 편성|뮐라이 해전|시킬리아 해전과 사르디니아 해전|아프리카 침공 작전|헛된 강화 요구|카르타고의 준비|레굴루스의 패배|아프리카에서의 철군|소강 국면: 시킬리아에서 전쟁의 재발|해전 중지, 파노르무스에서 로마군 승리|릴뤼바이움 포위 공격|드레파눔 앞바다에서 로마 함대의 패배|당황한 로마 인들|시킬리아의 소규모 전투|로마 함대|강화조약의 체결|제1차 카르타고 전쟁의 회고

제3장 자연 경계까지 확대된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자연 경계|시킬리아|사르디니아|해외 정복지 정책|속주의 법무관|속주 행정|1할세와 관세|이탈리아와 속주|아드리아 해의 상황|일뤼리아의 해적; 스코드라 원정|일뤼리아 영토의 획득|켈트족과의 전쟁|텔라몬 전투|공격받는 켈트족의 영토|로마에 정복된 켈트족|전 이탈리아의 로마화

제4장 하밀카르와 한니발
강화 이후 카르타고|카르타고의 주화파(主和派)|총사령관 하밀카르|하밀카르의 전략|카르타고 정부와 바르카스 집안|로마 정부와 바르카스 집안|한니발|로마와 카르타고의 갈등|이탈리아로의 진격 준비|공격 방법|한니발의 출발|로마의 상황|갈리아에 도착한 한니발|마살리아의 스키피오|로다누스 강을 통과하다|한니발의 알프스 통과|결과

제5장 칸나이 전투까지의 한니발 전쟁
한니발과 이탈리아 켈트족 |북부 이탈리아의 주인이 된 한니발|한니발의 군사 정치적 상황|한니발의 아펜니노 산맥 통과|플라미니우스|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이탈리아 동해안의 한니발|남부 이탈리아 전쟁: 파비우스|카푸아 진격과 아풀리아 전쟁|파비우스와 미누키우스|로마의 새로운 전쟁 준비|칸나이 전투|칸나이 전투의 결과|히스파니아로부터 병력 지원 실패|아프리카로부터 병력 지원|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의 동맹|카르타고와 쉬라쿠사이의 동맹|한니발의 카푸아와 남부 이탈리아 지배|로마군의 태도

제6장 칸나이에서 자마에 이르는 한니발 전쟁
위기|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한니발의 캄파니아 무력시위|새로운 캄파니아 전투|한니발의 방어전|일시적으로 좌절된 지원|시킬리아 전쟁의 종결|쉬라쿠사이의 정복|시킬리아 유격전|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성과 없는 전쟁|필립포스와 희랍 도시국가들의 강화조약|필립포스와 로마와의 강화|히스파니아 전쟁|스키피오 부자(父子)의 성공|이베르 강 이남 히스파니아|푸블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의 히스파니아 원정|안달루시아 공략|히스파니아 점령|가데스 함락|이탈리아 전쟁|군대의 주둔 상황|남부 이탈리아의 충돌|로마군의 아르피 수복|한니발의 타렌툼 함락|카푸아 주변의 전투|한니발이 로마로 진군하다|카푸아의 무조건 항복|로마 인의 우세|한니발의 수세|전쟁의 압박|동맹들|하스드루발의 접근|새로운 무장: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의 진군|메타우로스 강 전투: 하스드루발의 죽음|한니발: 브루티움으로 퇴각|소강상태의 이탈리아 전쟁|마고의 이탈리아 상륙|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아프리카의 대비|스키피오의 해군 진영|카르타고 진영에 대한 기습 공격|강화협정|한니발의 아프리카 귀환|전투 재개|자마 전투|강화협정|전쟁의 결과|이탈리아 외부|이탈리아 내부

제7장 한니발 전쟁에서 제3차 카르타고 전쟁까지
파두스 강 유역의 정복|알프스 이북 켈트족의 유입|파두스 강 이남의 식민화|리구리아|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카르타고|한니발|카르타고에 계속되는 로마의 도발|누미디아 인|마시니사|누미디아의 확장과 문명화|히스파니아의 상황|로마 인과 히스파니아 인의 전쟁|로마의 히스파니아 주둔군|히스파니아의 행정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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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테오도르 몸젠,김남우,김동훈,성중모
독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 주로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4년간 알토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1837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학위를 받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관된 로마시대의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장래 연구방향의 큰 틀을 잡았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몇 년을 외국에서 머물다가 185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베를린 대학의 로마사 교수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863-66년, 1873-79년의 시기 동안 프러시아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비스마르크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유당과 사민당이 연정을 구성할 것을 충고하였다. 1879년 대학 동료가 유대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자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그의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 대출한 고문서들이 함께 재가 되었다. 1902년 로마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소수에 해당된다. 그는 1500여 개의 연구작업을 통해 로마사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마련했다. 그의 걸작은 1854년부터 56년까지 저술한 『로마사』 3권으로 이 책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카이사르의 통치를 19세기 말의 시기와 비교 해석하였다.

그는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소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스스로 기억할만한 업적으로는 '로마헌법'의 저술을 꼽고 있다.
독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 주로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4년간 알토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1837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학위를 받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관된 로마시대의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장래 연구방향의 큰 틀을 잡았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몇 년을 외국에서 머물다가 185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베를린 대학의 로마사 교수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863-66년, 1873-79년의 시기 동안 프러시아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비스마르크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유당과 사민당이 연정을 구성할 것을 충고하였다. 1879년 대학 동료가 유대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자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그의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 대출한 고문서들이 함께 재가 되었다. 1902년 로마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소수에 해당된다. 그는 1500여 개의 연구작업을 통해 로마사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마련했다. 그의 걸작은 1854년부터 56년까지 저술한 『로마사』 3권으로 이 책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카이사르의 통치를 19세기 말의 시기와 비교 해석하였다.

그는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소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스스로 기억할만한 업적으로는 '로마헌법'의 저술을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