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경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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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5/04/19
Pages/Weight/Size 152*225*40mm
ISBN 9788992229807
Categories 소설/시/희곡 > 시/희곡
Description
양륜의 『두시경전』은 정밀하고 간략함으로 유명하다. 천착하지 않으며 견강부회하지 않고 뛰어남을 자랑하지 않으며 박식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평이하면서도 시의 뜻을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어서 두보의 정신이 활자 위에 분명하게 드러나니,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Contents
권구卷九
1. 강가에서 읊조리다 江頭五詠
정향나무 丁香
여춘초 麗春
치자나무 梔子
뜸부기 ??
비오리 花鴨
2. 사람이 두려워 畏人
3. 숨어 지내며 屛跡三首
4. 소년행 少年行
5. 소년행 少年行
6. 절구 絶句
7. 즉흥적으로 卽事
8. 들판 정자를 읊어 보낸 엄무 공의 시에 화답하다 奉酬嚴公寄題野亭之作
금강의 들판 정자를 읊어 두보에게 보내다. - 엄무 附) 寄題杜二錦江野亭 - 嚴武
9. 중승 엄무가 왕림하여 찾아오다 嚴中丞枉駕見過
10. 엄 중승을 칭송하는 어떤 농부가 억지로 술을 권하다 遭田父泥飮美嚴中丞
11. 중승 엄무의 ?서성만조?에 화답하다 奉和嚴中丞西城晩眺十韻
12. 중승 엄공이 빗속에 보고 싶다는 절구 한 수를 보내오자, 절구 두 수로 화답하다 中丞嚴公雨中垂寄見憶一絶 奉答二絶
13. 중승 엄무가 청성산 도사의 유주 한 병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다 謝嚴中丞送靑城山道士乳酒一甁
14. 절구 세 수 三絶句
15. 장난 삼아 절구 여섯 수를 짓다 ?爲六絶句
16. 시골 사람이 붉은 앵두를 보내오다 野人送朱櫻
17. 엄공이 술과 안주를 가지고 한 여름에 초당을 찾아주다 嚴公仲夏枉駕草堂兼?酒饌 得寒字
18. 엄공의 청사 잔치에서 촉도의 지도를 같이 읊다 嚴公廳宴同詠蜀道地圖 得空字
19. 장난 삼아 벗에게 주다 ?贈友二首
20. 큰 비 大雨
21. 시내가 넘치다 溪漲
22. 보리의 노래 大麥行
23. 엄공이 조정에 들어가는 것을 전송하다 奉送嚴公入朝十韻
24. 엄 시랑을 전송하다가 면주에 이르러 함께 두 사군의 강가 누대의 잔치에 오르다 送嚴侍郎到綿州 同登杜使君江樓宴 得心字
두보와 이별하며 수창하다 - 엄무 酬別杜二 嚴武
25. 봉제역에서 거듭 엄무 공을 보내다 奉濟驛重送嚴公四韻
26. 재주 이 사군의 부임을 전송하다 送梓州李使君之任
27. 물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다 觀打魚歌
28. 또 물고기 잡는 것을 보다 又觀打魚
29. 월왕 누대를 노래하다 越王樓歌
30. 해종의 노래 海?行
31. 강초공이 그린 각응을 노래하다 姜楚公?角鷹歌
32. 파서역의 정자에서 강물이 불어나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 두 사군에게 드리다 巴西驛亭觀江漲 呈竇十五使君
33. 또다시 두 사군에게 드리다 又呈竇使君
34. 동진에서 낭주녹사 대리로 부임하는 위풍을 전송하다 東津送韋諷攝?州錄事
35. 광록판의 노래 光祿坂行
36. 힘든 싸움의 노래 苦戰行
37. 지난 가을의 노래 去秋行
38. 둘째 아들 종무의 생일 宗武生日
39. 고적에게 부치다 寄高適
40. 현무선사 사당의 벽에 쓰다 題玄武禪師屋壁
41. 슬픈 가을 悲秋
42. 나그네의 밤 客夜
43. 객정에서 客亭
44. 중양절에 재주성에 오르다 九日登梓州城
45. 중양절에 대부 엄무에게 보내다 九日奉寄嚴大夫
파령에 있는 두보에게 답하다 - 엄무 巴嶺答杜二見憶 嚴武
46. 장난삼아 지어 한중왕에게 보내드리다 ?題寄上漢中王三首
47. 달을 감상하여 한중왕에게 올리다 翫月呈漢中王
48. 별가 엄이에게 주는 상종행 相從行贈嚴二別駕
49. 가을이 저물다 秋盡
50. 들에서 바라보며 野望
51. 겨울에 금화산의 도관에 이르렀다가 고 습유 진자앙의 학당 유적을 보다 冬到金華山觀 因得故拾遺陳公學堂遺跡
52. 습유 진자앙의 고택 陳拾遺故宅
53. 문공의 절을 배알하다 謁文公上方
54. 사홍의 이씨 어른에게 올리다 奉贈射洪李四丈
55. 아침에 사홍현을 떠나 남쪽으로 가는 길에 짓다 早發射洪縣南途中作
56. 통천역 남쪽으로 통천현에서 시오리 떨어진 곳의 산수를 보고 짓다 通泉驛南去通泉縣十五里山水作
57. 곽대공의 옛집을 지나며 過郭代公故宅
58. 태자소보 설직의 글씨와 벽화를 보다 觀薛稷少保書?壁
59. 통천역 관청의 벽 뒤에 그려진 소보 설직의 학 그림 通泉縣署屋壁後薛少保?鶴
60. 왕 시어를 모시고 통천의 동산 야정에서 잔치하다 陪王侍御宴通泉東山野亭
61. 왕 시어를 모시고 동산의 최고봉의 잔치에 참석한 뒤, 통천 요 현령이 저물녘 술을 가져와 강에 배를 띄우다 陪王侍御同登東山最高頂宴 姚通泉晩?酒泛江
62. 어양 漁陽
63. 관군이 하남과 하북을 수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聞官軍收河南河北
64. 멀리서 노닐며 遠遊



권십卷十
1. 봄날 재주의 누대에 오르다 春日梓州登樓二首
2. 봄날 장남삼아 시를 지어 학 사군 형을 곤혹스럽게 하다 春日?題惱?使君兄
3. 꽃 밑에서 花底
4. 버드나무 옆에서 柳邊
5. 처현 곽 명부의 초가집 벽에 쓰다 題?縣郭三十二明府茅屋壁
6. 도수감사 최옹이 협을 내려가는 것을 전송하다 奉送崔都水翁下峽
7. 처성의 서쪽 들판에서 형인 이 판관과 아우인 무 판관이 성도부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城西原送李判官兄武判官弟赴成都府
8. 부강에 배를 띄우고 위반이 서울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江泛舟送韋班歸京得山字
9. 배를 띄우고 위 창조가 서울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중윤 잠삼과 낭중 범계명에게 아울러 보내다 泛舟送魏十八倉曹還京 因寄岑中允參范郎中季明
10. 조정에 들어가는 노 시어를 전송하다 送路六侍御入朝
11. 부성현 향적사의 관청 누각에서 ?城縣香積寺官閣
12. 강에서 배를 띄워 길손을 보내다 泛江送客
13. 우두사에 올라서 上牛頭寺
14. 우두사를 바라보며 望牛頭寺
15. 도솔사에 올라서 上兜率寺
16. 도솔사를 바라보며 望兜率寺
17. 우두산의 정자에 올라 登牛頭山亭子
18. 밀감 농원에서 甘園
19. 재주 이 사군, 낭주 왕 사군, 소주 소 사군, 과주 이 사군 등을 모시고 혜의사에 오르다 陪李梓州王?州蘇遂州李果州四使君登惠義寺
20. 자주 재주 이 사군을 모시고 강에 배를 띄우고 놀았는데, 여러 배에 기생들이 있기에 장난삼아 염곡 두 수를 지어 이 사군에게 드리다 數陪李梓州泛江 有女樂在諸舫 ?爲艶曲二首贈李
21. 조정으로 돌아가는 하 시어를 전송하다 送何侍御歸朝
22. 강가 정자에서 미주별가인 신승지를 전송하다 江亭送眉州辛別駕昇之 得蕪字
23. 여행길에 염정현에 머물러 애오라지 율시 한 수를 지어 엄 수주와 봉주 두 자사와 자의참군의 여러 형제에게 편지삼아 올리다 行次鹽亭縣 聊題四韻 奉簡嚴遂州蓬州兩使君咨議諸昆季
24. 지팡이를 짚고 倚杖
25. 혜의사에서 성도로 가는 왕 소윤을 전송하다 惠義寺送王少尹赴成都 得峯字
26. 혜의사에서 신 원외랑을 전송하다 惠義寺園家辛員外
27. 다시 신 원외랑을 전송하며 又送
28. 왕 한주자사가 두 면주자사를 머물게 하여 방공이 만든 서호에서 배를 띄우고 논 것을 모시다 陪王漢州留杜綿州泛房公西湖
29. 방관 공의 호수에서 노니는 거위를 기르다 得房公池鵝
30. 양 재주자사에게 답하다 答楊梓州
31. 배 앞의 작은 거위 새끼 舟前小鵝兒
32. 관청 연못의 봄 기러기 官池春雁二首
33. 재주막부와 아울러 위 낭관에게 보내다 投簡梓州幕府兼簡韋十郎官
34. 한천의 왕 녹사 집에서 짓다 漢川王大錄事宅作
35. 위 찬선과 이별하며 주다 贈韋贊善別
36. 단가행을 지어 합주로 돌아가는 기 녹사를 보내며 아울러 소 사군에게 보내다 短歌行送祁錄事歸合州因寄蘇使君
37. 성도로 돌아가는 사직 위랑을 보내다 送韋郎司直歸成都
38. 강외의 초당에 대해 지어 부치다 寄題江外草堂
39. 비를 기뻐하며 喜雨
40. 옛날 일을 기술하며 述古三首
41. 어머니를 모시고 검중으로 돌아가는 왕 판관을 전송하다 送王十五判官扶侍還黔中得開字
42. 유후 장이를 모시고, 가주로 부임하는 가주 최 도독을 혜의사에서 전별하다 陪章留後惠義寺餞嘉州崔都督赴州
43. 시어 장 유후가 남쪽 누대에서 연회하는 것을 모시다 陪章留後侍御宴南樓得風字
44. 누대 위에서 ‘양?’자 운으로 짓다 臺上得?字
45. 재주자사 장이가 귤정에서 성도 두 소윤을 전별하다 章梓州橘亭餞成都竇少尹得?字
46. 재주자사 장이의 물가 정자에서 章梓州水亭
47. 유후 장이를 따라 새로 지은 정자에서 모여 여러 공을 전송하다 隨章留後新亭會送諸君
48. 장난스레 지어 한중왕에게 보내다 ?作寄上漢中王二首
49. 종려나무 파리채 ?拂子
50. 예전 처소에 묵으며 客舊館
51. 능주 노 사군이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다 送陵州路使君之任
52. 강동으로 가는 원이를 전송하다 送元二適江左
53. 성도로 돌아가는 두구를 전송하다 送竇九歸成都
54. 중양절에 九日
55. 나른한 밤 倦夜
56. 해가 넘어갈 때 薄暮
57. 장안에서 청성으로 부임하는 스물네 번째 외삼촌을 낭주에서 전송하다 ?州奉送二十四舅使自京赴任靑城
58. 왕 낭주자사의 송별연에서 열한 번째 외삼촌의 석별시에 화답하다 王?州筵奉酬十一舅惜別之作
59. 낭주 동루의 송별연에서 청성으로 가는 열한 번째 외삼촌을 전송하다 ?州東樓筵奉送十一舅往靑城得昏字
60. 배를 띄우고 放船
61. 저물녘에 노닐며 薄遊
62. 엄씨계에서 크게 노래하다 嚴氏溪放歌行
63. 봉례랑 엄이와 이별하다 與嚴二郎奉禮別
64. 배 남부현령에게 주다 贈裴南部
65. 비를 대하고 對雨
66. 시름겹게 앉아 愁坐
67. 전쟁의 경계가 위급하다 警急
68. 임금의 명령 王命
69. 전쟁하러 가는 사내 征夫
70. 서산 西山三首
71. 근심을 풀어보며 遣憂
72. 파산에서 巴山
73. 일찍 핀 꽃 早花
74. 강릉의 행차에 바라며 江陵望幸
75. 낭중을 떠나며 發?中
76. 하늘가의 노래 天邊行
77. 겨울에 사냥하는 노래 冬狩行
78. 산사에서 山寺
79. 도죽 지팡이의 노래를 지어 유후 장이에게 드리다 桃竹杖引贈章留後
80. 장차 오와 초로 떠나려고 하려 자사 장이 유후 겸 막부의 여러 공들과 이별하다 將適吳楚 留別章使君留後兼幕府諸公 得樹字
81. 아우 두점을 초당으로 돌려보내 집안을 살펴보게 하면서, 애오라지 이 시를 보이다 舍弟占歸草堂檢校 聊示此詩
82. 세모에 歲暮
권십일卷十一
1. 성 위에서 城上
2. 이엽 경을 전송하다 送李卿曄
3. 한 쌍의 제비 雙燕
4. 백설조 百舌
5. 봄날의 애상 傷春五首
6. 장안을 수복하다 收京
7. 파서에서 장안의 수복을 듣고, 반 사마가 장안으로 들어감을 전송하다 巴西聞收京闕 送班司馬入京二首
8. 근심을 풀어보며 釋悶
9. 하란섬에게 이별하며 주다 贈別賀蘭?
10. 하란섬에게 보내다 寄賀蘭?
11. 감회가 일어 有感五首
12. 옛날을 생각하며 憶昔二首
13. 낭산의 노래 ?山歌
14. 낭수의 노래 ?水歌
15. 남지에서 南池
16. 강가 정자에서 왕 낭주자사가 주관한 연회에서 소 수주자사를 전별하다 江亭王?州筵餞蕭遂州
17. 왕 사군을 모시고 그믐날 강에 배를 띄워 황가의 정자로 가다 陪王使君晦日泛江就黃家亭子二首
18. 강에 배를 띄우며 泛江
19. 강을 건너며 渡江
20. 추운 저녁에 暮寒
21. 나그네 遊子
22. 등왕의 정자 ?王亭子二首
23. 옥대관 玉臺觀二首
24. 시어 장이章彛에게 드리다 奉寄章十侍御
25. 장차 형남으로 가려고 이 검주자사에게 이별하며 드리다 將赴荊南寄別李劍州
26. 마 파주자사와 이별하며 드리다 奉寄別馬巴州
27. 엄무 대부를 기다리며 奉待嚴大夫
28. 낭주에서 처자를 거느리고 도리어 촉의 산길을 가다 自?州領妻子?赴蜀山行三首
29. 태위 방관의 묘를 떠나며 別房太尉墓
30. 장차 성도의 초당에 가려는데, 도중에 시를 지어 먼저 정국공 엄무에게 보내다 將赴成都草堂 途中有作 先寄嚴鄭公五首
31. 봄에 돌아가다 春歸
32. 초당으로 돌아오다 歸來
33. 성도 초당 草堂
34. 복숭아 나무을 읊다 題桃樹
35. 네 그루 소나무 四松
36. 물가 난간 水檻
37. 부서진 배 破船
38. 남쪽 이웃인 산사람 주씨의 물가 정자를 지나면서 過南?朱山人水亭
39. 누대에 올라 登樓
40. 고적 상시에게 보내다 奉寄高常侍
41. 공주의 최 녹사에 보내다 寄?州崔錄事
42. 왕 녹사가 초당 수리비용을 주기로 하였는데, 돈이 오지 않아 애오라지 조금 따지다 王錄事許修草堂?不到聊小詰
43. 돌아가는 기러기 歸雁
44. 절구 絶句二首
45. 산사람 사마씨에게 보내다 寄司馬山人十二韻
46. 시어 왕설에게 주다 贈王二十四侍御契四十韻
47. 황하 黃河二首
48. 깃발로 훈련하다 揚旗
49. 원외랑 이포에게 보내다 寄李十四員外布十二韻
50. 단청의 노래를 지어 조패 장군에게 드리다 丹靑引 贈曹將軍覇
51. 녹사 위풍의 집에서 조패 장군이 그린 말 그림을 보고 지은 노래 韋諷錄事宅觀曹將軍?馬圖歌
52. 위풍이 낭주의 녹사참군으로 승진하여 떠나는 것을 전송하다 送韋諷上?州錄事參軍
53. 태자사인 장씨가 양탄자를 주다 太子張舍人遺織成褥段
54. 고 교서랑 곡사융의 집을 지나며 過故斛斯校書莊二首
55. 변장邊將 동가영에게 보내다 寄董卿嘉榮十韻
56. 입추에 비가 내리니, 막부에서 짓다 立秋雨 院中有作
57. 정국공 엄무의 ?군성조추?에 화답하다 奉和嚴鄭公軍城早秋
군대 성의 이른 가을에 - 엄무 附) 軍城早秋 - 嚴武
58. 막부에서 저물녘 비가 개자 서쪽 성곽의 초당이 생각나다 院中晩晴懷西郭茅舍
59. 완화계에 도착하여 到村
60. 완화계에 내린 비 村雨
61. 막부에서 묵으며 宿府
62. 근심을 풀어서 엄무 공에게 바치다 遣悶奉呈嚴公二十韻
63. 제주로 가는 아우 두영을 전송하다 送舍弟穎赴齊州三首
64. 정국공 엄무의 계단 아래 새로 심은 소나무 嚴鄭公?下新松 得霑字
65. 정국공 엄무 댁에서 함께 대나무를 읊다 嚴鄭公宅同詠竹 得香字
66. 늦가을 정국공 엄무를 모시고 마하지에서 배를 띄우다 晩秋陪嚴鄭公摩訶池泛舟 得溪字
67. 정국공을 모시고 늦가을에 북지에서 경치를 바라보다 陪鄭公秋晩北池臨眺
68. 정국공 엄무의 청사에 있는 민산과 타강을 그린 그림을 보다 奉觀嚴鄭公廳事岷山?江?圖十韻 得忘字
69. 당계를 전송하며, 또한 예부시랑 가지賈至에게 보내다 送唐十五誡 因寄禮部賈侍郎
70. 초겨울 初冬
71. 이고가 요청하여 사마 동생의 산수도를 감상하다 觀李固請司馬弟山水圖 三首
72. 동지가 지나고 至後
73. 죽은 벗을 그리며 懷舊
74. 태주사호 정건鄭虔과 소감 소원명을 곡하다 哭台州鄭司戶蘇少監
75. 시어 왕설이 동천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려 방생지에서 잔치를 열다 送王侍御往東川 放生池祖席



권십이卷十二
1. 정월 3일에 완화계로 돌아와 지으며, 막부의 여러 공들에게 편지로 드리다 正月三日歸溪上有作 簡院內諸公
2. 누추한 집에서 흥을 풀어보며, 엄무 공에게 보내다 ?廬遣興 奉寄嚴公
3. 집을 짓다 營屋
4. 잡초를 뽑으며 除草
5. 봄날의 강촌 春日江村五首
6. 길게 읊조리다 長吟
7. 봄은 깊어가고 春遠
8. 절구 여섯 수 絶句六首
9. 절구 네 수 絶句四首
10. 절구 세 수 絶句三首
11. 반가운 비 喜雨
12. 나를 의심하지 말라는 노래 莫相疑行
13. 붉은 하늘의 노래 赤?行
14. 삼운으로 된 세 수 三韻三篇
15. 촉을 떠나며 去蜀
16. 청계역에서 묵으며, 장지서張之緖 원외랑 형을 그리며 올리다 宿靑溪驛 奉懷張員外十五兄之緖
17. 광가행을 지어 네 째 형에게 주다 狂歌行贈四兄
18. 융주 양 자사의 동루에서 잔치하며 宴戎州楊使君東樓
19. 투주에서 엄 시어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아 먼저 삼협으로 내려가다 ?州候嚴六侍御不到先下峽
20. 번민을 떨쳐내며 撥悶
21. 상시 고적이 타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聞高常侍亡
22. 충주자사인 조카의 집에서 잔치하며 宴忠州使君姪宅
23. 우임금의 사당 禹廟
24. 충주의 용흥사에서 거처하던 방의 벽에 쓰다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
25. 복야 엄무의 관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곡하며 哭嚴僕射歸?
26. 밤에 여관에서 회포를 적다 旅夜書懷
27. 배를 출발하며 放船
28. 운안에서 중양절에 정씨가 술을 마련하여 여러 공들을 모시고 잔치하다 雲安九日鄭十八?酒 陪諸公宴
29. 정랑에게 답하다 答鄭十七郎一絶
30. 상징군과 이별하며 別常徵君
31. 장강에서 長江二首
32. 고 재상 방관房琯의 영구가 낭주에서 발인하여 동도로 돌아가 장례를 치른다는 소식을 듣다 承聞故房相公靈?自?州啓殯歸葬東都 有作二首
33. 새벽 무렵에 將曉二首
34. 금수에서 살던 것을 회상하며 懷錦水居止二首
35. 푸른 실 靑絲
36. 절구 세 수 三絶句
37. 분함을 풀어보며 遣憤
38. 12월 1일에 十二月一日三首
39. 또 눈이 내리다 又雪
40. 비 雨
41. 초의 남쪽 지방에서 南楚
42. 수각에 아침 비가 그치니, 운안의 엄 명부에게 편지삼아 보내다 水閣朝霽 奉簡雲安嚴明府
43. 두견새 杜鵑
44. 자규 子規
45. 근래의 소문 近聞
46. 여관에서 客居
47. 객당에서 客堂
48. 돌벼루 石硯
49. 정분에게 주다 贈鄭十八賁
50. 채 저작랑과 이별하며 別蔡十四著作
51. 상징군에게 보내다 寄常徵君
52. 가주자사 잠삼에게 보내다 寄岑嘉州
53. 기주로 이사하여 거주하다 移居?州作
54. 배로 내려가다가 기주의 성곽에서 묵었는데, 강기슭이 비에 젖어 내리지 못하고 왕 판관과 이별하다 船下?州郭宿 雨濕不得上岸 別王十二判官
55. 되는 대로 짓다 漫成一首
56. 물을 끌어오다 引水
57. 요족 하인인 아단에게 示?奴阿段
58. 위유하 낭중에게 보내다 寄韋有夏郎中
59. 백제성에 올라 上白帝城
60. 백제성에 올라 지은 두 수 上白帝城二首
61. 여러 공들을 모시고 백제성 꼭대기에 올라 월공당에서 잔치하며 짓다 陪諸公上白帝城頭 宴越公堂之作
62. 백제성 가장 높은 누대에서 白帝城最高樓
63. 제갈무후의 사당 武侯廟
64. 팔진도 八陣圖
65. 선주의 사당을 참배하다 謁先主廟
66. 제갈량의 사당 諸葛廟
67. 늙은 측백나무의 노래 古柏行
68. 땔나무를 짊어진 아낙의 노래 負薪行
69. 배를 쉽게 운행하는 노래 最能行
70. 자사 원결의 ?용릉행?에 동감하며 同元使君?陵行
용릉의 노래 - 원결 ?陵行 - 元結
도적이 물러난 뒤 관리들에게 보이다 - 원결 賊退示官吏 - 元結

두시경전 원문
Author
두보,이관성
두 보(杜甫, 712∼770)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 시단을 대표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인이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으로 제국의 붕괴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진사 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재차 유람에 나서는 한편 이백, 고적(高適)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삶에 대하여 절감하기 시작했다. 755년은 그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해였다. 그해 10월, 그는 10년 노력의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이후 두보의 삶은 전란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된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에 떨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이후 두보의 삶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전란의 와중에 현종(玄宗)은 사천으로 피난 가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임시로 즉위한 사실을 알고 두보는 이를 경하하기 위해 영무로 가던 중 반군에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되어 얼마간 억류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봄의 전망(春望)』을 썼다. 757년 2월, 숙종이 행재소를 봉상(鳳翔)으로 옮겼을 때 두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을 배알하여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것은 곧이어 파직으로 이어졌다.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행을 감행한다. 두보의 대표적 사회시로 알려진 이른바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 이즈음에 지어졌다.

759년 두보는 진주에서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여 성도(成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막부(幕府)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엄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이르게 되었다. 기주는 성도에 비해서도 더욱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시가 창작에서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가을날의 흥취(秋興八首)』를 꼽을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풍요로웠던 과거와 일순간에 일어난 전란을 지극히 미려한 언어로 수를 놓듯이 새긴 이 시는 율시(律詩)가 이룩한 미감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보는 기주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에서 벼슬하리라는 희망을 끝내 놓을 수 없었기에, 768년에 협곡을 빠져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과 담주(潭州) 사이를 전전하다 뱃길에서 사망하였다.
시인 두보가 품었던 뜻은 시종일관 정치를 바르게 펼쳐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었으나 운명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전란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삶은 자기 한 몸도 돌보기 힘들만큼 곤란해지는 때가 많았다.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은 아니었으나, 역설적으로 상황이 열악해질수록 그는 더욱더 시인의 눈으로 피폐한 사람과 영락한 사물을 따뜻하게 돌아보고,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 사후에 그에게 붙은 ‘시성(詩聖)’이나 ‘시사(詩史)’라는 칭호는 그의 고단하고 정직했던 삶에 대한 애도 어린 칭송이 아닐까 한다.
두 보(杜甫, 712∼770)는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으로 이백(李白)과 함께 중국 시단을 대표하며 우리에게도 친숙한 시인이다. 그는 본래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몸담고자 했으나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시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두보가 처한 시대는 당나라가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다가 안사의 난으로 제국의 붕괴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그의 생애는 크게 보아 755년에 발발한 안사의 난을 중심으로 전·후반으로 양분된다. 안사의 난 이전, 그는 당대의 다른 시인들처럼 독서와 유람으로 견문을 쌓아 착실히 벼슬에 나아갈 준비를 하였다. 735년 진사 시험의 낙제는 그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재차 유람에 나서는 한편 이백, 고적(高適)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746년 이후 두보는 거처를 장안으로 옮겨와 고위 관리에게 벼슬을 구하는 간알시(干謁詩)를 써서 보내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생활이 10년간 지속되면서 두보는 점차 경제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였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삶에 대하여 절감하기 시작했다. 755년은 그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해였다. 그해 10월, 그는 10년 노력의 결과로 무기의 출납을 관리하는 우위솔부주조참군(右衛率府?曹參軍)이라는 미미한 벼슬을 받고 스스로 낭패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당 왕조를 거의 멸망시킬 만큼 파급력이 대단했던 안사의 난이 발발한다. 이후 두보의 삶은 전란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전개된다. 두보는 잠시 장안 근처 부주에 떨어져 살던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어린 아들이 먹지 못해 요절한 사실을 알고 참담한 마음으로 장편시 『장안에서 봉선으로 가며 회포를 읊어(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남겼다. 벼슬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당시 귀족들의 사치와 서민들의 궁핍한 처지를 그렸으며 총체적인 사회의 부패상을 고발했다.
이후 두보의 삶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다. 전란의 와중에 현종(玄宗)은 사천으로 피난 가고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임시로 즉위한 사실을 알고 두보는 이를 경하하기 위해 영무로 가던 중 반군에 붙잡혀 장안으로 호송되어 얼마간 억류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봄의 전망(春望)』을 썼다. 757년 2월, 숙종이 행재소를 봉상(鳳翔)으로 옮겼을 때 두보는 위험을 무릅쓰고 장안을 탈출하여 숙종을 배알하여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벼슬을 받았다. 그러나 곧 반군 토벌에 실패한 방관(房琯)을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게 되고 그것은 곧이어 파직으로 이어졌다. 화주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으로 좌천된 두보는 벼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행을 감행한다. 두보의 대표적 사회시로 알려진 이른바 『삼리(三吏)』와 『삼별(三別)』이 이즈음에 지어졌다.

759년 두보는 진주에서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여 성도(成都)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초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막부(幕府)에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엄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에 이르게 되었다. 기주는 성도에 비해서도 더욱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고 시가 창작에서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의 대표작으로 『가을날의 흥취(秋興八首)』를 꼽을 수 있다.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풍요로웠던 과거와 일순간에 일어난 전란을 지극히 미려한 언어로 수를 놓듯이 새긴 이 시는 율시(律詩)가 이룩한 미감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보는 기주 생활에 결코 안주하지 못했다. 중앙 정부에서 벼슬하리라는 희망을 끝내 놓을 수 없었기에, 768년에 협곡을 빠져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에 이르렀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선상에서 이루어졌고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과 담주(潭州) 사이를 전전하다 뱃길에서 사망하였다.
시인 두보가 품었던 뜻은 시종일관 정치를 바르게 펼쳐 백성을 구원하는 데 있었으나 운명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전란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삶은 자기 한 몸도 돌보기 힘들만큼 곤란해지는 때가 많았다.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그의 꿈은 아니었으나, 역설적으로 상황이 열악해질수록 그는 더욱더 시인의 눈으로 피폐한 사람과 영락한 사물을 따뜻하게 돌아보고,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시를 썼다. 사후에 그에게 붙은 ‘시성(詩聖)’이나 ‘시사(詩史)’라는 칭호는 그의 고단하고 정직했던 삶에 대한 애도 어린 칭송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