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 제1권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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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13/04/09
Pages/Weight/Size 153*224*30mm
ISBN 9788994079813
Categories 역사
Description
고대 이탈리아의 시작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는 로마 건국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망까지를 그린 로마의 역사서이다. 기존의 로마사 연구서와 달리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어 좀 더 실증적이며 객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몸젠의《로마사》는 세 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으며, 제1권(제1, 2, 3책) 1854년, 제2권(제4책) 1855년, 제3권(제5책) 1856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1856년에는 제1권이 개정 증보되었고, 1857년에는 나머지 두 권도 개정 증보되어 다시 출간되었다. 1903년 11월 사망 직전 몸젠이 최종적으로 손본 제9판은 제1권이 1902년, 제2권이 1903년, 제3권이 1904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이 책은 고대 이탈리아의 시작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룬 제1권의 절반을 담았다.

몸젠은 이 책에서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다고 말한다. 국가 체계의 형태를 갖추고 난 이후 로마라는 도시 공동체가 이탈리아 반도를, 이후 세계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좀 더 높은 차원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그렇게 주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젠은 강조한다. “흔히 로마 인에 의한 이탈리아 정복이라고 불리는 것은 기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다. 로마 인들이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세력이긴 했으나, 아무튼 그들도 이들 가운데 한 부분이었을 뿐이다.”

《몸젠의 로마사 제1권-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는 이 가운데 고대 이탈리아의 시작부터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를 다루고 있다. 몸젠은 이탈리아의 역사가 크게 둘로 나뉜다고 본다. 우선 이탈리아 어계의 주도 아래 이탈리아가 통일되기까지의 내부 역사가 그 하나이고, 이탈리아가 세계를 지배하기까지의 역사가 또 다른 하나다. 따라서 몸젠은 이탈리아 반도에 이탈리아 어계 민족이 정착하는 과정, 희랍인과 에트루리아 인 등 다른 계통 민족이나 선주 문명이 이탈리아 어계의 민족적·정치적 존재를 위협하고 부분적으로 복속시킨 과정, 이탈리아 어계가 다른 계통 민족에 저항하며 그들을 물리치거나 정복한 과정, 마지막으로 같은 이탈리아 어계인 라티움 사람들과 삼니움 사람들이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벌인 갈등과 라티움 사람들이 기원전 4세기 후반에 혹은 로마 인들이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최종적으로 승리한 과정 등을 기술하고자 한다.
Contents
옮긴이 서문

제1장 서론
고대 역사│이탈리아│이탈리아의 역사

제2장 이탈리아로의 최초 이주
이탈리아의 초기 종족들│이아퓌기아 인│이탈리아 인│이탈리아 어와 희랍어의 관계│라티움 어와 움브리아·삼니움 어의 관계│인도·게르만 어│희랍·이탈리아 문화│농경│경제 이외의 모습│이탈리아와 희랍의 이름 체계│가족, 국가, 종교│예술

제3장 라티움 사람들의 정착
인도·게르만 어족의 이주│이탈리아에서 라티움 인의 확장│라티움│라티움 정착│부락│초기 부락의 위치│라티움 부락 연맹체

제4장 로마의 시작
람네스 부족│티티에스 부족과 루케레스 부족│라티움의 로마 정주지│로마 지역의 특징│로마 지역의 초기 경계│팔라티움│일곱 언덕│팔라티움 언덕 주변의 초기 정착│퀴리날리스 언덕의 로마 인들│팔라티움과 퀴리날리스 공동체의 관계

제5장 로마의 초기 국가 체제
로마 가족│가부장과 그 권한│가족과 씨족│가족의 의탁인│로마 공동체│왕│공동체│시민의 평등│시민의 공역│시민의 권리│원로원│원로원의 권한│국헌의 수호자 원로원│자문기관으로서의 원로원│로마의 초기 국가 체제

제6장 비시민과 국가 체제의 개혁
팔라티움 지역과 퀴리날리스 지역의 융합│시민과 영주민│공동체 외곽에서 살아가는 영주민│상민│세르비우스 개혁│인구조사│세르비우스 군대 정비의 정치적 효과

제7장 라티움 지방에서 로마의 패권
로마의 영토 확대│아니오·알바롱가의 영토│초기 정복지에 대한 처분│로마와 라티움의 관계│알바롱가 몰락 이후 로마의 확장│수도 로마의 확장 : 세르비우스 성

제8장 움브리아·사비눔 부족 : 삼니움 부족의 시작
움브리아·사비눔 부족의 이주│삼니움 부족

제9장 에트루리아 인
에트루리아 민족│에트루리아 인의 고향│에트루리아 인의 뤼디아 기원설│에트루리아 인의 이탈리아 정착│에트루리아│에트루리아와 라티움의 관계│타르퀴니우스 집안│에트루리아의 국가 체제

제10장 이탈리아의 희랍인 : 에트루리아 인과 카르타고 인의 제해권
이탈리아와 주변 민족들│이탈리아의 페니키아 사람들│이탈리아의 희랍인 : 희랍 식민지│희랍 식민지 활동의 시기│희랍 이주민들의 성격│아카이아 식민 도시들│이오니아·도리아 식민지│타렌툼│베수비우스 근처의 식민 도시들│아드리아 해 지역의 희랍인들│이탈리아 서해안의 희랍인들│희랍과 라티움│희랍과 에트루리아│희랍과 페니키아의 경쟁

제11장 법과 법정
이탈리아 역사의 현대적 성격│사법제도│민사재판│절도│계약│후견 제도│상속제도│노예해방│피호민과 영주민│로마법의 특징

제12장 종교
로마의 종교│아주 오래된 로마 공공 축제│마르스와 유피테르│로마 신들의 특징│정령│사제│신탁 중재자│외국 종교│사비눔의 종교│에트루리아의 종교

제13장 농업, 상업과 무역
농업│공동경작│포도 농사│올리브 재배│무화과│농가 경영│대토지 소유│공동 초지│수공업│이탈리아 내의 상업 활동│해양 무역│무역에 적극적인 에트루리아, 수동적인 라티움│에트루리아와 아티카, 라티움과 시킬리아

제14장 측량과 문자
십진법과 십이진법│희랍 도량형│희랍의 영향을 받기 전 이탈리아 역법│희랍 알파벳의 이탈리아 도입│이탈리아 알파벳의 발전│결과│언어와 문자의 변이

제15장 예술
이탈리아 인의 예술적 재능│라티움의 춤과 음악과 노래│종교적 가창│칭찬 노래와 비방 노래│가면 익살극│운율│가락│가면│라티움에서 초기 희랍의 영향│라티움에서 시와 교육의 특징│사비눔과 에트루리아의 춤과 음악과 노래│초창기 이탈리아 건축물│사비눔과 에트루리아에서 초기 희랍의 영향│이탈리아의 조형예술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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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테오도르 몸젠,김남우,김동훈,성중모
독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 주로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4년간 알토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1837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학위를 받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관된 로마시대의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장래 연구방향의 큰 틀을 잡았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몇 년을 외국에서 머물다가 185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베를린 대학의 로마사 교수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863-66년, 1873-79년의 시기 동안 프러시아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비스마르크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유당과 사민당이 연정을 구성할 것을 충고하였다. 1879년 대학 동료가 유대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자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그의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 대출한 고문서들이 함께 재가 되었다. 1902년 로마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소수에 해당된다. 그는 1500여 개의 연구작업을 통해 로마사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마련했다. 그의 걸작은 1854년부터 56년까지 저술한 『로마사』 3권으로 이 책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카이사르의 통치를 19세기 말의 시기와 비교 해석하였다.

그는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소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스스로 기억할만한 업적으로는 '로마헌법'의 저술을 꼽고 있다.
독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프로테스탄트교 목사의 아들로 1817년에 태어났다. 어린시절 주로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4년간 알토나의 김나지움에서 공부하였다. 1837년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학위를 받고 183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덴마크 왕이 주는 연구장학금으로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보관된 로마시대의 비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법률연구는 주로 로마법을 내용으로 삼았기에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장래 연구방향의 큰 틀을 잡았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몇 년을 외국에서 머물다가 1857년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연구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듬해 베를린에서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베를린 대학의 로마사 교수가 되었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1863-66년, 1873-79년의 시기 동안 프러시아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비스마르크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유당과 사민당이 연정을 구성할 것을 충고하였다. 1879년 대학 동료가 유대인을 반대하는 정치적 운동을 벌이자 강력히 규탄하기도 했다.

1880년 7월, 그의 서재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 등에서 대출한 고문서들이 함께 재가 되었다. 1902년 로마사 연구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소수에 해당된다. 그는 1500여 개의 연구작업을 통해 로마사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는 틀을 마련했다. 그의 걸작은 1854년부터 56년까지 저술한 『로마사』 3권으로 이 책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의 몰락과 카이사르의 통치를 19세기 말의 시기와 비교 해석하였다.

그는 비문학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되는 인물로, 평소 새벽 5시에 일어나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던 구전자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으며 고전시대를 이상화하는 계몽주의식 연구태도를 거부했다. 스스로 기억할만한 업적으로는 '로마헌법'의 저술을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