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사직소

조선을 움직인 한 편의 상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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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3/03/01
Pages/Weight/Size 142*225*10mm
ISBN 9791197117534
Categories 인문 > 한국철학
Description
바른말이 사라진 우리 시대,
조식(曺植)의 직언(直言)을 읽는다!

서슬 푸른 칼날이 쏟아진다!


불의한 날불한당들의 시대였다. 명종(明宗) 즉위 초기ㅡ, 대궐에는 유학자들의 시신이 쌓이고, 논밭에는 백성들의 시신이 썩어갔다. 유학자 조식은 이와 같은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조식은 『을묘사직소』를 올려 당시의 정치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는다. 상소의 형식은 막 제수받은 현감 직을 사직하는 사직 상소였으나 상소의 내용은 격렬했다. 임금인 명종을 어린아이라고 말하고 대비인 문정왕후를 과부라고 말한다. 곧 임금은 임금이 아니고 대비는 대비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권력을 독점한 권신(權臣)들을 향해서는 ‘야비한 승냥이 떼’라는 독설을 퍼붓는다. 왕조 시대 임금의 권위를 생각하면 이는, 조식이 상소문 위에 자신의 목을 잘라 올려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것은 목숨을 건 언사만이 아니었다. 조식은 당대의 학문인 유학의 이념과 논리를 바탕으로 치밀한 논리를 전개했다.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을 곧바로 짚어내고, 또 담대하면서도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누구도 이 『을묘사직소』의 말에 이렇다 할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었다. 『을묘사직소』는 유학자의 정신, 학문하는 자의 역할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이 『을묘사직소』는 조선의 뜻있는 유학자들에게 ‘상소’의 전범(典範)과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써 유학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쫓는 일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 알았다. 그리고 의(義)로움을 따라 살고자 노력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이다. 지식인의 직언을 들을 수 없는 시대이다. 아무도 공의(公義)를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공인이라는 이름 뒤에 숨고 때로는 전문가라는 이름 뒤로 물러난다. 말해야 할 일을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곡학아세(曲學阿世)와 견강부회(牽强附會)가 판을 친다. 지금, 조식의 『을묘사직소』를 읽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Contents
◎ 읽기 어려운「을묘사직소」주해(注解)하여 풀이하기

주해(注解) 번역 을묘사직소

① 어깨 위에 큰 산을 올려놓은 것처럼 두려워합니다
②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출처(出處)는 신중해야 합니다
③ 신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쇄소(灑掃)의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합니다
④ 헛이름을 바치고 벼슬을 받는 일은 매관(買官)보다 못합니다
⑤ 거센 회오리바람이 언제 불어올지 알 수 없습니다
⑥ 전하는 임금의 책무를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뿐입니다
⑦ 냇물이 끊기고 낟알 비가 내리는 일은 그 조짐이 무엇이겠습니까?

⑧ 전라도 남해안에서 일어난 달량포왜변은 갑작스러운 변고가 아닙니다
⑨ 우리는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했던 나라입니다
⑩ 전하가 좋아하여 따르고자 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⑪ 삼감(敬)으로써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⑫ 딛고 설 발판이 없으므로 우리 유가에서는 불가를 배우지 않습니다
⑬ 자신을 닦는 것으로, 현명한 인재를 뽑아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⑭ 절박한 마음으로, 죽을죄를 범하며 아룁니다

축어(逐語) 번역 을묘사직소
Author
조식,이상영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던 유학자이다. 성리학 이론보다는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당대의 학문적 위상이나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황 이상이었다.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얼토당토않은 정치를 펼치는 때에 벼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조정의 정치를 정면으로 추궁했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1572년 진주목 덕산동(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일생을 마쳤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제자들이 그의 글을 모아 묶은 <남명집>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접할 수 있다.
1500년대 경상도 일대의 산림에 머물며 학문에 몰두했던 유학자이다. 성리학 이론보다는 실천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황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당대의 학문적 위상이나 이후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이황 이상이었다.

여남은 번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단 한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간신들이 권력을 잡고 얼토당토않은 정치를 펼치는 때에 벼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에 상소를 올려 조정의 정치를 정면으로 추궁했다. 1555년 을묘년에 명종에게 올린 <을묘사직소>에서는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다”고 썼다. 이로써 유학자의 마땅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올바른 유학자의 전형을 세웠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현재의 합천군 삼가면)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1572년 진주목 덕산동(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의 산천재(山天齋)에서 일생을 마쳤다.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이다. 제자들이 그의 글을 모아 묶은 <남명집>을 통해 그의 삶과 학문을 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