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는 1913년 독립운동가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를 부친으로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금택(金鐸), 신식 학교 교육이 시작된 시절이었으나 엄격한 가통(家統)에 묶여 신교육은 엄두도 못 내고 집에서 수학했다. 20세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다시 3년간 도교에 심취하였는데, 지금 ‘노장 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도교 지식도 이때에 흡수한 것이다.
탄허 스님이 입산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의 일로, 17세에 성혼하여 이미 아들까지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평생의 스승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구도의 편지를 띄우기 수 년, 당시 오대산 상원사에 있던 한암 스님의 성화(聖華; 훌륭한 이름)를 듣고 편지를 낸 데서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첫 답장이 오고 다시 편지 왕래를 하기 3년, 갓 쓰고 도포 입은 유생은 “3년, 길어야 10년”을 기약하고 오대산을 찾아들었으나, 한암 스님의 인품에 매료되어 이것이 영영 탈속의 길이 되었다.
스승인 한암 스님이 입적하기까지 21년 동안 줄곧 상원사에 머물렀던 탄허 스님은 6?25 이후 동래 범어사, 통영 용화사, 삼척 영은사 등지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격화하는 비구?대처 싸움을 피해 다시 상원사로 갔다. 이 시기를 제외한다면 그의 승려 생활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1955년, 한국대학(지금은 폐쇄됐음)의 요청으로 맡았던 노장철학(老莊哲學) 강의는 오늘날까지 명강의로 유명하다. 처음 1주일 예정이었던 것이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두 번에 걸쳐 연장, 두 달간을 끌었다. 이 강연의 수강생 명단에는 함석헌 선생에서부터 양주동 박사에 이르기까지 당대 쟁쟁한 학자들도 적잖게 포함되어 있어 그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한암 스님은 생전에 화엄경론의 집필을 기구했었는데, 수제자 탄허 스님의 10년에 걸친 대불사도 그의 유촉에 의한 것이다. 1961년, 그 유촉을 받들어 방대한 규모의 화엄합론 번역을 시작했다.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피가 맺히는 난해한 연의(演義) 작업’에 매달려 발원한 지 10년만인 1971년 봄, 원문 10조 9만 5천48자에 달하는 『화엄경』 80권 집필을 마쳤다.
부처가 행한 49년의 설법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 위대하며 광대무변하다는 『화엄경』은 일본에서 번역?출판된 적은 있으나 논(論)을 번역, 주석한 학자는 없었다. 화엄학뿐만 아니라 동양 사상의 집대성이라고나 할 이 집필은 원고지로 6만 2천 5백여 장이나 되는 대불사이며, 출판 경비가 당시 무려 수천 만 원으로 추정되어 탈고 2년 반이 지난 시점까지 출판 기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 얘기를 들은 일본불교신도회에서 원고를 사겠다고 나섰지만, 탄허 스님은 이를 뿌리쳤다. 후대에라도 좋으니 우리나라 국민들의 손에 이 원고를 꼭 넘겨주고 싶은 염원에서였다.
어렵사리 출판 기금을 마련하여 이 원고는 1975년 『신화엄경합론』이란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탄허 스님은 역해 완간 공로를 인정받아 동아일보사 주최 제3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했다. 이 경전은 자상한 주석을 곁들여 우리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원효·의상 대사 이래 최대의 불사”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생을 불교 경전 연구와 번역에 전념한 탄허 스님은 선교 양종에 수많은 업적을 쌓았고, 이러한 체계 위에서 동양의 마음을 찾으려 애쓴 대표적인 선지식이자 선지자였다. 1983년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열반에 들기 전까지 탄허 스님은 동양의 역학 원리로 어제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역사를 예지한 선지식이자 선지자였으며, 비록 몸은 산간에 머물렀으나 눈은 우주의 운행을 꿰뚫어 보았다.
탄허는 1913년 독립운동가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를 부친으로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금택(金鐸), 신식 학교 교육이 시작된 시절이었으나 엄격한 가통(家統)에 묶여 신교육은 엄두도 못 내고 집에서 수학했다. 20세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다시 3년간 도교에 심취하였는데, 지금 ‘노장 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도교 지식도 이때에 흡수한 것이다.
탄허 스님이 입산한 것은 스물두 살 때의 일로, 17세에 성혼하여 이미 아들까지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평생의 스승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구도의 편지를 띄우기 수 년, 당시 오대산 상원사에 있던 한암 스님의 성화(聖華; 훌륭한 이름)를 듣고 편지를 낸 데서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첫 답장이 오고 다시 편지 왕래를 하기 3년, 갓 쓰고 도포 입은 유생은 “3년, 길어야 10년”을 기약하고 오대산을 찾아들었으나, 한암 스님의 인품에 매료되어 이것이 영영 탈속의 길이 되었다.
스승인 한암 스님이 입적하기까지 21년 동안 줄곧 상원사에 머물렀던 탄허 스님은 6?25 이후 동래 범어사, 통영 용화사, 삼척 영은사 등지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격화하는 비구?대처 싸움을 피해 다시 상원사로 갔다. 이 시기를 제외한다면 그의 승려 생활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1955년, 한국대학(지금은 폐쇄됐음)의 요청으로 맡았던 노장철학(老莊哲學) 강의는 오늘날까지 명강의로 유명하다. 처음 1주일 예정이었던 것이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두 번에 걸쳐 연장, 두 달간을 끌었다. 이 강연의 수강생 명단에는 함석헌 선생에서부터 양주동 박사에 이르기까지 당대 쟁쟁한 학자들도 적잖게 포함되어 있어 그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한암 스님은 생전에 화엄경론의 집필을 기구했었는데, 수제자 탄허 스님의 10년에 걸친 대불사도 그의 유촉에 의한 것이다. 1961년, 그 유촉을 받들어 방대한 규모의 화엄합론 번역을 시작했다.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피가 맺히는 난해한 연의(演義) 작업’에 매달려 발원한 지 10년만인 1971년 봄, 원문 10조 9만 5천48자에 달하는 『화엄경』 80권 집필을 마쳤다.
부처가 행한 49년의 설법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 위대하며 광대무변하다는 『화엄경』은 일본에서 번역?출판된 적은 있으나 논(論)을 번역, 주석한 학자는 없었다. 화엄학뿐만 아니라 동양 사상의 집대성이라고나 할 이 집필은 원고지로 6만 2천 5백여 장이나 되는 대불사이며, 출판 경비가 당시 무려 수천 만 원으로 추정되어 탈고 2년 반이 지난 시점까지 출판 기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 얘기를 들은 일본불교신도회에서 원고를 사겠다고 나섰지만, 탄허 스님은 이를 뿌리쳤다. 후대에라도 좋으니 우리나라 국민들의 손에 이 원고를 꼭 넘겨주고 싶은 염원에서였다.
어렵사리 출판 기금을 마련하여 이 원고는 1975년 『신화엄경합론』이란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탄허 스님은 역해 완간 공로를 인정받아 동아일보사 주최 제3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했다. 이 경전은 자상한 주석을 곁들여 우리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원효·의상 대사 이래 최대의 불사”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생을 불교 경전 연구와 번역에 전념한 탄허 스님은 선교 양종에 수많은 업적을 쌓았고, 이러한 체계 위에서 동양의 마음을 찾으려 애쓴 대표적인 선지식이자 선지자였다. 1983년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열반에 들기 전까지 탄허 스님은 동양의 역학 원리로 어제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역사를 예지한 선지식이자 선지자였으며, 비록 몸은 산간에 머물렀으나 눈은 우주의 운행을 꿰뚫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