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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ation Date 2020/01/25
Pages/Weight/Size 153*224*35mm
ISBN 9788984114517
Categories 인문 > 동양철학
Description
이 책은 유학의 본원을 탐구하는 책이다. 이 책은 상·하 두 권으로 나뉜다. 상권은 「원학통原學統」과 「원외왕原外王」이고, 하권은 「원내성原內聖」이다.

「원학통原學統」은 ‘유학 학통의 본원을 탐구’하고, 「원외왕原外王」은 ‘밖으로 왕도의 본원을 탐구’하며, 「원내성原內聖」은 ‘안으로 성인됨의 본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원학통」은 공자孔子가 태고太古 이래로 전해온 훌륭한 왕들의 덕을 이어 받아 집대성하고,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이 하나로 관통하는 큰 학통을 열었음을 설명한다.

「원외왕」은 『대역大易』·『춘추春秋』·『예기禮記』「예운禮運」·『주관周官』이라는 네 개의 경전을 융회·관통하여, 이로부터 성인이 지나간 것을 헤아리고 앞으로 올 것을 알아서 영원히 태평성세를 여는 큰 도리를 드러냈음을 밝힌다.

「원내성」은 공자의 인생관과 우주론을 총괄적으로 설명하면서 『대역大易』에 대해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Contents
역자 서문_5
원유재인기(原儒再印記: 재판 서문)_7
원유서(原儒序: 서문)_11
일러두기_19

제1장 서언(緖言)

1-1 『양론(量論: 지식론)』의 구성: 「비량편(比量篇)」과
「증량편(證量篇)」 31
1-1-1 「비량편(比量篇: 논리학)」 상(上): 만물을 변별하고 용어를 바로잡음_32
1-1-2 「비량편(比量篇: 논리학)」 하(下): 신묘함을 궁구하여 조화(造化)를 앎_37
1-1-3 「증량편(證量篇: 지혜론)」: 본성의 지혜를 함양함_50
1-1-4 『양론(量論: 지식론)』 저술 목적_53

1-2 『대역광전(大易廣傳)』의 구성: 「내성편(內聖篇)」과
「외왕편(外王篇)」 56
1-2-1 『대역광전(大易廣傳)』의 제요(提要): 『원유(原儒)』_57
1-2-2 주대(周代) 말기 옛 전적에 대한 진·한대(秦·漢代) 사람들의 훼손_57
1-2-3 중국전통학문의 3가지 결점에 대한 논의: 과학사상, 민주사상, 이론 체계_63

제2장 원학통(原學統: 학통의 본원을 탐구함)

2-1 공자의 학문 1: 50세 이전 시(詩)·서(書)·예(藝)·예(禮)의
실용학 74
2-1-1 시(詩)_74
2-1-2 서(書)_75
2-1-3 예(藝)_76
2-1-4 예(禮)와 악(樂)_79
2-1-5 예(禮)_82

2-2 공자의 학문 2: 50세 이후 『역(易)』 철학 89
2-2-1 50세에 『역』을 연구함[五十而學易]_91
2-2-2 내성외왕(內聖外王)_95

2-3 고대학문을 집대성한 공자의 유학 - 제자학[六家]의 근원 105
2-3-1 묵가_105
2-3-2 도가_109
2-3-3 명가_142
2-3-4 농가_152
2-3-5 법가_154
2-3-6 『장자(莊子)』 「천하편(天下篇)」으로 본 내성외왕_166
2-3-7 제자(諸子) 사상이 유학과 다른 점_178

2-4 공자의 학문이 행해지지 않은 이유 181
2-4-1 진시황의 분서갱유_182
2-4-2 한대의 육경 훼손과 유학자의 변절: 전제군주제 옹호_184

2-5 육경(六經)은 모두 공자가 창작했다 202
2-5-1 『역(易)』, 『춘추(春秋)』_202
2-5-2 『주관경(周官經)』_204
2-5-3 『서(書)』_218
2-5-4 『시(詩)』_225
2-5-5 『악경(樂經)』_231

2-6 육경(六經)의 훼손과 개작(改作) 235
2-6-1 『역(易)』 「계사전」 첫머리의 문제점_236
2-6-2 『춘추(春秋)』의 왜곡_241
2-6-3 박문(博文) 공부가 결핍된 송명리학_280
2-6-4 유행(流行)의 도리를 거역한 대승불교_286

2-7 결 론 293
2-7-1 『역』의 소식(消息)·효진(爻辰)·승강(升降)의 의미_295

제3장 원외왕(原外王: 외왕의 본원을 탐구함)

3-1 공자의 대동(大同)사상 307
3-1-1 『예기』 「예운(禮運)」의 대동과 소강(小康)_307
3-1-2 별도의 단행본 『예운(禮運)』_313
3-1-3 후창(後倉)과 대성(戴聖)의 『예운(禮運)』 개찬_315

3-2 공자 외왕학의 진상(眞相) 317
3-2-1 관중(管仲)의 대의(大義)에 대한 공자의 평가: 거란세(據亂世)에 대한 부정_320
3-2-2 공자의 『詩』에 대한 평가와 가르침_323
3-2-3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고문상서(古文尙書)』_324
3-2-4 공자의 육경(六經): 천하가 공평하게 되는 대도(大道)_327
3-2-5 『주관경(周官經)』: 태평세로 진입하기 위한 제도_329

3-3 『역(易)』·『춘추』·『예운(禮運)』·『주관경(周官經)』을 통해 본
공자의 외왕사상 334
3-3-1 『역』 「계사전」의 격물학 제창_334
3-3-2 『역』 「서괘전」의 사회발전론_355
3-3-3 『춘추』의 천하위공(天下爲公) 사상_365
3-3-4 『예운(禮運)』의 반전제주의 혁명사상 전석_421
3-3-5 『주관경(周官經)』의 외왕사상_443
3-3-6 『주관경』의 학교제도_491

3-4 『맹자』를 통해 본 농가(農家)의 외왕사상 495

색인_512
Author
웅십력,임헌규
웅십력(熊十力, 1885-1968)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황강현(黃岡縣)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계지(繼智)·승항(升恒)이고, 호는 자진(子眞)이며, 만년에는 자칭 칠원노인(漆園老人)이라고 하였다. 40세에 스스로 십력(十力)으로 개명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남의 집 소를 키우는 일을 하며 부친의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배웠다. 1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큰형을 좇아 농사일을 하며 공부했고, 16세 이후에는 홀로 학문을 연마하며 진백사(陳白沙)·왕부지(王夫之)·고염무(顧炎武) 등의 책을 읽고, 혁명의 길로 나가겠다고 결심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포기했다. 18세 때(1902년) 무창(武昌)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1911년에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이후에 손중산(孫中山)을 좇아서 원세개의 북양군벌(北洋軍閥)에 반대하는 호국(護國)·호법(護法) 전쟁에 참가했다. 그 후 34세(1918년)에 웅십력은 “당인들이 당권과 이익만을 다투니, 혁명은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탄식하며, “진정한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에 있다.”는 점을 깨닫고 마침내 학문의 길로 나섰다. 1920년 가을 절친한 친구인 양수명(梁漱溟)의 소개로 구양경무(歐陽竟無)의 남경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에서 2년 동안 불교를 연구했으며, 1922년 겨울 북경대 총장인 채원배의 초빙으로 북경대 교수가 되었다.
1923년에 『신유식론(新唯識論)』 초고를 쓰기 시작해서 1932년 문언본 『신유식론』을 출판했고, 이어서 『파?파신유식론?(破?破新唯識論?)』·『불학명상통석(佛學名相通釋)』을 발표했다. 항일전쟁기간에는 사천으로 피난 가서 마일부(馬一浮)·양수명이 주관하는 복성서원(復性書院)과 면인서원(勉仁書院)에서 강의하다가 1947년 북경대로 돌아왔다. 1940년대에 웅십력은 어체본 『신유식론』·『십력어요(十力語要)』·『독경시요(讀經示要)』·『십력어요초독(十力語要初讀)』 등을 펴냈고, 1950년 이후에는 『논육경(論六經)』·『원유(原儒)』·『체용론(體用論)』·『명심편(明心篇)』·『건곤연(乾坤衍)』 등을 출판했다. 특히 1956년에 완성한 『원유』는 “육경이 나를 주석한다.[六經注我]”는 방식으로 웅십력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유학 경전과 유학사를 새롭게 해석한 중요한 저술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말년의 웅십력은 반동복고주의자라고 낙인찍혀 많은 비판과 고초를 당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중국문화와 인간본성을 훼손한다고 항거하여 단식투쟁하는 도중에 결국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84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체용불이(體用不二)’·‘심물불이(心物不二)’·‘흡벽성변(翕闢成變)’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철학은 현대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의 기틀을 세웠으며, 그것은 이후 당군의·서복관·모종삼 등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웅십력(熊十力, 1885-1968)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황강현(黃岡縣) 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계지(繼智)·승항(升恒)이고, 호는 자진(子眞)이며, 만년에는 자칭 칠원노인(漆園老人)이라고 하였다. 40세에 스스로 십력(十力)으로 개명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남의 집 소를 키우는 일을 하며 부친의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배웠다. 11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큰형을 좇아 농사일을 하며 공부했고, 16세 이후에는 홀로 학문을 연마하며 진백사(陳白沙)·왕부지(王夫之)·고염무(顧炎武) 등의 책을 읽고, 혁명의 길로 나가겠다고 결심하고는 과거시험 공부를 포기했다. 18세 때(1902년) 무창(武昌)에서 군대에 입대하여 1911년에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이후에 손중산(孫中山)을 좇아서 원세개의 북양군벌(北洋軍閥)에 반대하는 호국(護國)·호법(護法) 전쟁에 참가했다. 그 후 34세(1918년)에 웅십력은 “당인들이 당권과 이익만을 다투니, 혁명은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탄식하며, “진정한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에 있다.”는 점을 깨닫고 마침내 학문의 길로 나섰다. 1920년 가을 절친한 친구인 양수명(梁漱溟)의 소개로 구양경무(歐陽竟無)의 남경 지나내학원(支那內學院)에서 2년 동안 불교를 연구했으며, 1922년 겨울 북경대 총장인 채원배의 초빙으로 북경대 교수가 되었다.
1923년에 『신유식론(新唯識論)』 초고를 쓰기 시작해서 1932년 문언본 『신유식론』을 출판했고, 이어서 『파?파신유식론?(破?破新唯識論?)』·『불학명상통석(佛學名相通釋)』을 발표했다. 항일전쟁기간에는 사천으로 피난 가서 마일부(馬一浮)·양수명이 주관하는 복성서원(復性書院)과 면인서원(勉仁書院)에서 강의하다가 1947년 북경대로 돌아왔다. 1940년대에 웅십력은 어체본 『신유식론』·『십력어요(十力語要)』·『독경시요(讀經示要)』·『십력어요초독(十力語要初讀)』 등을 펴냈고, 1950년 이후에는 『논육경(論六經)』·『원유(原儒)』·『체용론(體用論)』·『명심편(明心篇)』·『건곤연(乾坤衍)』 등을 출판했다. 특히 1956년에 완성한 『원유』는 “육경이 나를 주석한다.[六經注我]”는 방식으로 웅십력 자신의 독특한 관점으로 유학 경전과 유학사를 새롭게 해석한 중요한 저술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말년의 웅십력은 반동복고주의자라고 낙인찍혀 많은 비판과 고초를 당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중국문화와 인간본성을 훼손한다고 항거하여 단식투쟁하는 도중에 결국 지병이 악화되어 향년 84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체용불이(體用不二)’·‘심물불이(心物不二)’·‘흡벽성변(翕闢成變)’을 핵심으로 하는 그의 철학은 현대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의 기틀을 세웠으며, 그것은 이후 당군의·서복관·모종삼 등의 제자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