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지난 100년 동안 엉터리 번역의 굴레에 갇혀 있던 『열하일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다. 오늘 우리가 ‘조선 시대 최고의 고전’,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예찬하는 『열하일기』의 문학적 상업적 지위에 관해서는 더 이상 무슨 토를 달 수는 없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 『열하일기』의 번역 문제는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 있다. 중국의 우리 역사 왜곡이 심각한 오늘, 우리의 한문학은 영웅 만들기에 심취되어 부실한 번역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는 괴테가 있고, 중국에는 소동파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박지원이 있다”, “『열하일기』는 노마드(유목민)의 유쾌한 유목일지이다” 같은 유의 화려한 광고 문안이 『열하일기』의 오역이라는 서글픈 진실을 가볍게 가려 버렸다. 오늘날은 고전 번역에 있어서 과거에 비하면 옛 자료들을 찾아보기 쉬운 환경이다. 하지만 고전 원본을 뒤지기 싫어하는 게으른 번역 태도로 인하여 민족 최고의 고전이라고 찬미하는 문학 작품이 여전히 너무 깊은 오역의 구렁텅이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현재 우리가 가장 많이 읽는 『열하일기』의 번역본은 리상호본, 이가원본, 김혈조본, 고미숙본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역서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완벽하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본이라는 광고와는 다르게, 여전히 수많은 오역과 어설픈 주석으로 포장된 채 우리 독자들의 지적 양식이 되고 있다. 특히 연암 문학 연구로 유명한 김혈조 교수가 2017년 ‘새 번역 완역 결정판’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새 번역본에도 원본 문장의 전고나 낱말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아 잘못 옮긴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박지원의 숨소리 하나조차 놓치지 않았다고 한 광고 문안과는 다르게, 리상호본과 이가원본의 잘못된 해석을 거의 그대로 베끼거나 엉뚱하게 해석한 문장도 꽤나 보였다. 원본의 여러 오류도 여전히 상당수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예컨대 「관내정사」에는 여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화미조畵眉鳥라는 새의 울음소리에 비유한 구절이 있는데, 화미조의 울음소리를 여러 번역본에서는 ‘눈썹 그리는 소리’로 잘못 번역했다. 원문에는 “不識佳人何處在, 隔簾疑是畵眉聲”로 나온다. (쉬욤출판사 『열하일기』 1권 424쪽 참조).
리상호본: 모를러라 예쁜 그대 어데 있던고? 주렴 속에 들리는 그 소릴러라.
이가원본: 아리따운 님이시여 있는 곳을 몰랐더니 눈썹 그리는 그 소리 주렴 넘어 들리는 듯
김혈조본: 모를레라, 임이 어느 곳에 있는 줄. 발 넘어 눈썹 그리는 소리, 그 님이 아닐까?
윤규열본: 아름다운 여인이 어느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렴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마도 화미조가 노래하는 소리일 것이다.
다음은 「곡정필담」에서 곡정이 연암에게 피곤해하는 윤가전은 매일 한낮에 ‘웅경조신熊經鳥伸’이라는 양생법을 행한다고 설명하는 구절이다. 웅경조신은 『장자』에 나오는 도가의 양생법으로, 곰처럼 나무에 매달리고 새처럼 다리를 쭉 뻗는 동작을 취한다. 원본에는 “不欲令人見他, 熊鳥小數”로 나온다. (쉬욤출판사 『열하일기』 2권 449쪽 참조).
리상호본: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초라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하고 싶어 그렇지….
이가원본: …남들에게 그의 이런 꼴을 뵈지 않으려고 했긴 하나….
김혈조본: …남들에게 자신이 하는 양생법의 하찮은 기예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윤규열본: …남에게 자신의 하찮은 웅경조신 수련법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오늘의 우리는 조선 유학자에 비하면 중국 역사와 고전에 대한 지식이 절대로 부족하다. 그래서 번역본에 실려 있는 주석의 오류도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학문적으로도 영향력이 있는 김혈조본의 오류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김혈조본(1권, 323쪽)에서 오삼계는 조대수의 외조카(외생)이지만, 장인으로 잘못 설명했다. 위나라의 군주를 지낸 조조, 조비, 조예를 위씨삼조魏氏三朝라고 하는데, 김혈조본(2권, 312쪽)의 주석에서는 조조와 조비, 그리고 왕위에 오르지도 않았던 조조의 셋째 아들 조식을 넣어 삼조라고 기술했다.
또 김혈조본(2권, 151쪽)에서는 사신의 개인 수행원 격인 반당伴當(자제군관)을 사신 행차에 자부담으로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주석을 달았지만, 사실 사신의 기본 경비는 봉황성에서부터는 청나라에서도 도움을 주었고, 국내 구간에서는 사신이 지나가는 고을에서 많이 부담했었다. 이를테면 사신 행차가 청나라 고을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었다는 사실을 무시한 주석이다.
【2012년에 최초로 공개된 초고본 계열 『열하일기』의 번역본】
이 책은 기본적으로 2012년에 처음으로 공개된 연민문고의 초고본 계열 『열하일기』를 저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편집하여 간행한 『연암집』 중의 『열하일기』(박영철본)도 초고본 계열의 필사본들과 비교하여 그 내용의 차이를 주석으로 달았다. 특히 이 책에는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명, 지명, 여러 사건의 배경 이야기 등에 관한 상세한 서지적 주석이 매 권마다 1,000~1,500여 개가 달려 있어,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연암이 풀어 놓는 방대한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중국의 옛 서적들에서 여러 지도와 삽화 등을 찾아내어 문장의 이해를 도왔고, 청나라 말기의 옛 사진들도 곳곳이 넣어서 청나라 여행의 현장감도 높였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칠순 잔치)을 축하하러 간 사행단의 일원이 되어 연경과 열하를 구경하고 돌아와서 쓴 견문록이다. 전체 28편 중 앞부분에 해당하는 「도강록」에서 「환연도중록」까지의 7편은 날짜별로 기록한 일기체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경개록」에서 「천애결린집」까지의 나머지 21편은 청나라 사람들과 나누었던 문답 형식의 글과 여러 명소의 견문 기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행단은 그해 6월 24일 의주성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요동(요양), 성경(심양), 산해관을 거쳐 8월 1일 연경에 도착한다. 그리고 건륭제의 초대로 8월 5일 연경을 출발한 사행단은 8월 9일 열하에 도착하여 6일을 체류한 뒤, 8월 20일에 다시 연경으로 돌아온다. 『열하일기』는 6월 24일부터 8월 20일까지의 기록으로, 연암이 청나라에서 56일 동안, 4천 리 길을 이동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을 기본 배경으로 하여서 쓴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 여행기이다.
Contents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 열하의 태학太學에 묵으면서 청나라 학자들 필담을 나누는 이야기이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 열하에서 연경으로 되돌아오는 6일 동안의 기록이다.
경개록傾蓋錄 ―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머물면서 청나라 학자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황교문답黃敎問答 ― 티베트 불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선시말班禪始末 ― 판첸라마의 내력에 관해 쓴 글이다.
찰십륜포札什倫布 ―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행재잡록行在雜錄 ― 사행에 관련된 여러 문서의 내용을 소개한 글이다.
심세편審勢編 ― 청나라의 문화 정책을 통해 천하의 대세 등을 살핀 글이다.
망양록忘羊錄 ― 고금의 음악과 그 이론에 관한 필담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鵠汀筆談 ― 천체, 정치, 종교 등의 여러 주제로 곡정 왕민호와 필담한 내용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 ― 피서산장의 만수절 행사 등과 관련된 기록이다.
Author
윤규열
호는 연암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 운동의 선두 주자였으며 많은 문장을 후세에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자랐으며,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이고,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이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양육하였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후로는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파벌 싸움의 여파까지 겹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은거하였다. 1780년(정조 4년) 친척인 박명원(朴明源)이 사신으로 북경에 가게 되자 수행원이 되어 6월부터 10월까지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저서로는『열하일기(熱河日記)』, 작품으로는「허생전(許生傳)」,「민옹전(閔翁傳)」,「광문자전(廣文者傳)」,「양반전(兩班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등이 있다.
호는 연암이며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려고 하였던 북학 운동의 선두 주자였으며 많은 문장을 후세에 남긴 작가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자랐으며,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이고,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 이씨이다. 아버지가 벼슬 없는 선비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이 양육하였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후로는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서상수(徐常修), 유득공(柳得恭), 유금(柳琴) 등과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정철조(鄭喆祚) 등과 ‘이용후생에 대해 자주 토론하였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파벌 싸움의 여파까지 겹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은거하였다. 1780년(정조 4년) 친척인 박명원(朴明源)이 사신으로 북경에 가게 되자 수행원이 되어 6월부터 10월까지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저서로는『열하일기(熱河日記)』, 작품으로는「허생전(許生傳)」,「민옹전(閔翁傳)」,「광문자전(廣文者傳)」,「양반전(兩班傳)」,「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등이 있다.